우리의 길지않은 현대사에도 정치인이나 정당이 수없이 명멸을 거듭하였다. 그들의 명멸에 있어서 항상 작용하는 것이 바로 명분이다. 신당을 만들어도 명분이 필요하고, 분당을 해도 명분이 필요하며, 중요한 선거나 국회의 의결에도 항상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뚜렷한 명분이다.
정치 생존의 필수조건, '명분'
정치적 행보를 하는데 명분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 정당이나 정치인은 성공하지 못하고 곧 정치의 무대에서 잊혀지고 만다. 양김의 힘으로 창당된 신민당을 고집스럽게 장악하려던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당수가 그랬고, 신정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하려던 박찬종이 그랬다. 경선에 불복하고 출마한 이인제와 국민신당도 그런 실패의 전형이다. 명분이 없이는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존립할 수 없는 것이 정치의 세계이다. 그런 명분이 진실한 것이든 포장된 것이든 관계없이 명분이 적절해야 정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특별히 3김처럼 지역적 철통지지를 확보하고 있는 정치인이 아니라면 더더욱 명분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탄핵의 역풍에 힘입은 바 크지만 열린우리당의 창당도 그럴싸한 명분이 없었다면 지난 총선의 승리는 불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민주당의 후단협이 명분을 제공했고, 머리채 사건과 난닝구 사건이 명분이 되었으며, 국민의 정부의 숱한 비리가 명분을 제공하였다. 또 창당시 제시한 명분도 시대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부정부패가 없는 깨끗한 정치' , '당원이 주인되는 상향식 정당' , '지역구도를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지향하는 정당' , '100년 정당' 등의 구호는 우리국민의 정치에 대한 욕구를 적절히 수렴한 훌륭한 명분이었다.
한나라당을 부활시킨 훌륭한 '명분'
총선이 끝나고 한나라당이 서서히 부활한 것도 잘 살펴보면 그럴싸한 명분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국민은 적절한 견제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진실성의 여부와 관계없이 철저한 반성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천막당사나 천안연수원 국고환수같은 것도 그런 반성의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 공천비리에 연루된 정치인들에게 강한 징계를 내린 사실도 국민의 뇌리에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느끼게 만든 원인이다. 물론 여당의 잘못에 대한 반사이익도 넓은 의미에서 한나라당을 지지할 명분이 되어 준 것이다. 거기에 대통령을 너나없이 비판하는 여론은 한나라당에게 더없이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 주었다. 항상 내용의 구체성이나 진실성에 관계없이 민생이라는 용어를 되뇌이는 것도 지지받을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정치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에는 적절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들키면 국민의 외면을 받고 설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명분이 반드시 진실한 것일 필요는 없다. 국민이 그럴싸하다고 느끼면 훌륭한 명분이 된다.
열린우리당을 추락시킨 눈속임 '명분'
그러나, 잠시의 눈속임은 곧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시 제시된 명분들이 정치인들의 진실을 담고 있지 않았음은 이미 들통난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 지지율이 최악이고, 지역적 지지기반이 없는데다, 대통령의 낮은 인기가 겹쳐있는 당을 버리고 떠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굴뚝같지만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기간당원들이 정치인들에 의하여 잘 조절되지 않는 불편함은 이미 넌더리가 나지만, 명분이 없거나 약하고 국민에게 먹힐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탈당의 결행은 쉽지않은 일이다.
물론 이미 탈당한 국회의원 30여명은 단지 통합을 외치고 반한나라당 전선을 구축하자는 것으로도 명분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창당의 핵심주역들은 그럴 입장이 되지 못한다. 그냥 대세를 따라서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사람들이야 창당시 제시한 명분에 대하여 책임이 덜하지만 창당의 주역들은 그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한다.
특히 정동영 전의장은 창당을 진두지휘한 인물이기 때문에 책임이 무겁고 명분도 훨씬 강한 것이 필요하다. 민주당의 분당, 창당시 제시한 명분이 거짓이었다는 점, 열린우리당의 최대지분 소유자로서 당을 실패로 이끌었다는 점등을 모두 덮을만한 원대한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그의 최근 행보를 보면 명분을 찾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못 찾겠다! 탈당의 '명분'
기간당원제가 당을 망쳤다고 강력히 주장하던 때가 있었다. 지난 1월말에 열렸던 중앙위원회의 당헌당규 재개정이 실패할 경우 그것을 명분으로 삼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총리나 대통령의 의사에 따라서 참정연등이 개정안을 수용함으로써 명분을 잡는데 실패했다. 탈당을 감행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것으로 국민이 충분한 명분이라고 생각해줄 지는 미지수다.
그 다음으로 그는 다시 당사수파와 기간당원들을 싸잡아 겨냥한다. 끝없이 적을 만들고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이 당을 망쳤다. 그들과는 통합신당을 함께 할 수 없다. 이렇게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만일 전당대회가 원만히 치뤄지고 김근태계와 사수파등이 모두 함께 가는 길이 모색된다면 역시 독자행보를 선택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당을 망친 것이 정동영계인지 사수파와 기간당원인지는 진영에 따라서 생각이 다른 문제지만 일단은 명분을 그렇게 찾아야 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리고 상당수가 이미 탈당을 감행하였지만 전당대회까지는 당에 남을 모양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정치불개입을 강력히 요구한다. 대통령은 가장 비중있는 정치인이다. 정치인에게 정치불개입을 요구하는 것은 대단히 무리한 일이다. 또 어디까지가 개입이고, 어디까지가 불개입인지 판단할 기준이 모호하다. 바꿔 말하자면 언제라도 대통령이 정치에 개입하거나 관여한다는 비난을 남기고 당을 떠날 명분을 잡기에 훌륭한 무기를 만들어둔 셈이다.
'명분' 없는 종착역
결국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국민이 보기에 흡족한 명분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미 탈당한 사람들도 그렇고 앞으로 탈당할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통합신당은 가능하지 않고, 분열신당들이 여럿 등장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서로 너무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지역구도로 회귀하기 위한 노력에 불과하다. 서로 협력하기 보다는 각기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다투게 될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인다.
분열신당들을 여러개 만들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통합 통합 통합 하며 울었나보다. 민주당 복당파, 홀로 외로이파, 정동영파, 김근태파, 천정배파, 잔류파등등 모두가 우는 목소리는 한결같다. 통합,통합,통합,통합,통합,통합,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