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불제 민주주의"의 의미를 두고 비판적인 시각이 있군요.
저 또한 책이 나오기 전이니 상상력 만으로 왈가왈부하는 꼴이 되겠습니다만, 인터뷰 내용에서 느낀 바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국민주권국가에서 주인인 국민이 제 역할을 못하면 종들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어느 사회고 그 사회의 체제를 규정하는 것과 동시에 그 체제를 유지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민중의 역량과 참여가 필요하다. 사회도 체제도 사람이 만들고 운영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앞서가는 이도 있고 뒤쳐져 가는 이도 있으며 따로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중심에서 어떤 틀거리를 만들게 되면 현실의 민중과 상호작용하고 동시에 괴리상태가 생기는 것이다. 앞선 이들이 선언했다고 당장 그런 세상이 되지는 않는다. 현실의 제약이 수많은 반동을 수반하고 민중이 그 반동을 이겨낼 수 있을 때 선언이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때 선언은 민중이 가야 할 바 등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서구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시대의 정신을 함축한 선언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나오고, 민중이 그에 부응하면서 부단한 역사의 궤적을 그려온 것 아니겠나. 한 방울 피 흘리고 한줄 바꾸고, 두방울 흘리고 두줄 바꾸는 식은 아니지만 시대의 정신을 함축하는 과정과 시대가 움직여나가는 부단한 작용과 반작용의 누적이 있어왔다면 그 만큼의 역사적 댓가가 있어왔고 그 무게만큼의 사회를 구축했고 아직 미진한 만큼의 또 다른 궤적을 그려갈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의 민중은 분명 저항의 역사를 일궈왔다. 굳이 쥬신과 비류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동학혁명부터 3.1운동 그리고 4.19와 이어온 민주화 투쟁의 역사가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친일은 처단해야 한다면서도 척결하지 못했고, 사상의 자유는 있다면서도 반공이데올로기의 포로이며,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고무신과 막걸리 선거판도 치뤄왔고, 국민통합을 이야기하면서도 지역주의조차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 아닌가. 그러니 헌법의 선언과 규범, 헌법 규범과 법률, 법률과 운용, 운용과 민중의 삶으로 전개되는 마디 마다 청산되지 않은 구시대의 잔재들이 아직도 켜켜이 쌓여있는 것이다. 지나온 길 만큼이나 가야할 길도 많이 남아있는 셈이다.
민주주의는 갈등이 파국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근현대 들어 인류의 보편적 지성과 지식이 교류하면서 보편적 가치기준과 행동양식들이 국경을 넘어 스며들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라면 비록 미흡한 역사의 잔재를 싸안고 있다 하더라도 단두대에서 머리 자르고 피를 뿌리는 시대는 지나갔다. 역사의 궤적과 무게가 그 정도의 토대는 마련했다는 얘기다. 허나 지금 시점에서 얼마나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가치관과 이념의 경쟁에 앞서 그 토대가 제대로 기능하는 바탕이라야 사회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각자 원하는 것을 경주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밝혀줄 등대도 있고, 그 길을 따라 어느 정도 지나온 바도 있다. 이편 저편 갈라서 악다구니 싸움만 한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먼저 기본으로 돌아가 이미 밝혀져있는 선언의 정신을 규범으로 만들어내고, 규범을 충실한 법률로, 법률을 운용으로 그리고 삶으로... 그렇게 이끌어내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견해가 다르든 입장이 다르든 싸움이라도 싸움답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삶의 비전이 미래에 있듯이 시대의 정신도 그 사회의 미래를 지향하고있는 것이다.
사람이 미래를 위해 오늘을 투자하듯이 사회도 지향하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책 표지의 촛불들 처럼 그렇게 할부금을 치뤄가는 것 아닐까?
이제 인터뷰 내용을 보자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책을 준비 중이시라던데 제목의 의미가 뭔가요?
그냥 헌법에 대한 상식적인 이야기를 담았어요. 우리나라 헌법은 세계의 어느 국가의 헌법과 겨뤄도 뒤지지 않아요. 서방국가에서 내전이 일어나 수 만명이 죽고, 왕 목잘라 죽이고 엄청난 유혈의 강을 건너 쟁취한 헌법을 그대로 카피Copy해 들여 온 것이죠. 투쟁 없이 여성 참정권이 있고, 인권이란 개념이 없던 시절에 ‘기본법’이 있게 됐고, 공장이 거의 없는데 ‘노동3권’이 있었죠. 그러나 그런 대가 없이 들여온 헌법에 대한 할부금을 우리는 계속 내고 있어요. 4.19나 5.18, 6월 항쟁이 그렇죠. 헌법을 우리 것으로 만드려면 후불로 할부금을 내야하는 거죠. 요즘도 그 할부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