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소름 돋게 하는 한 장면이 있다. 스페인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등장한 홍명보. 골을 성공시킨 후 뒤돌아서서 두 팔을 힘껏 펴고 바람을 가르며 미소짓는 그의 얼굴.
솔직히 난 울었다.
홍명보, 그는 늘 A매치에서 웃는 법이 없었다. 자신이 좋은 활약을 보였어도, 자신이 골을 넣었어도 라커룸으로 들어서는 순간까지 그는 웃는 법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날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맘대로 한껏 치켜세웠다가 경기내용에 관계없는 비판, 아니 비판이랄 수도 없는 비난을 일삼는 언론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국가대항 이외엔 경기장은 커녕 TV도 지켜봐 주지 않는 팬 아닌 축구팬들에게 전하는 무언의 시위였을까?
그렇게 늘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그라운드에서 뛰고 나서며 고개 떨구던 그가 그 날은 웃었다. 난 눈물이 났다. 4강 정도해야 비로소 언론들과 국민들에게 죄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예상했지만 언론들은 벌써 난리다.
"토고 잡아야 16강 간다"
"23인의 태극전사들!"
"투혼을 불사른다, 한국대표!"
이 무슨 빌어먹을 비장감이란 말인가. 토고 지면 한국축구 망할것 같다. 이겨도 그냥 당연한 결과일것 같다. 23인의 이 청년들을 언론과 국민들은 전사로 만들어 놓고 잔뜩 힘을 넣게 하고 있다. 욕심 혹은 아무런 책임없는 일갈뿐이지 않은가?
기업들과 언론들은 월드컵의 열기를 마케팅에 이용하고 그것으로 돈 벌고 이미지 높이는게 급선무라면 그도 그럴 수 있다고 해 두자. 우리는 뭔가?
4년전 그러니까 2002년. 우리는 이 젊고 착한 이들이 준 선물로 맘껏 그리고 실컷 즐기지 않았는가? 이제 그들이 즐겨야 한다. 이기든 지든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눈물 흘리고 가슴 벅차고 춤췄다. 그들은 왜 그러면 안되는가?
23인의 아우들아. 이제 너희들 차례다. 그라운드에서 맘껏 뛰고 달리고 부둥켜 안고 춤춰라. 맘껏 웃고 노래하라. 이제, 더 이상 홍명보가, 황선홍이, 유상철이 두 어깨에 짊어지고 뛰던 비장감과 전투의식을 이제 그만 던져 버려라.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과 몸으로 하늘로 솟구쳐 올라라.
"꼭 이기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조까튼 얘기는 이제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져도 좋다. 패스를 하며 드리블하며 슛을 날리며 너희들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게임을 즐겨라.
이제 더 이상 날 울리지 말아라. 너희가 웃고 노래하여 나도 함께 웃게 해줘라. 너희가 도대체 무슨 부채를 져서 언론들과 국민들에게 몰매를 맞아야 한단 말이냐.
축제가 시작됐다. 무대를 너희의 것으로 만들어라. 그 안에서 함께 웃자. 함께 즐기자.
23인의 아우들아, 마음껏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