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깁니다. 저는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의미있게 생각하고 좋아합니다. 우리의 행적이 모두 역사입니다. 사진은 아마추어의 시선으로 찍은 것이고, 뽀샵이 안되어 거칩니다.
1. 봉하로 봉하로
2009년 6월 14일 일요일 7:00 출발.
이것이 계획된 일정의 시작이었습니다. 개인 사정에 의해 몇 분이 못 오신 듯 했고, 전 날 꿈길 순례단 접대를 지극히 심하게 한 것에 비하면(저 말고 늦바람 대표님^^) 양호하게 시간을 잘 지켜서 32명을 태운 버스가 수원역 앞에서 평택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잠이 필요한 회원들도 많았을 텐데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불면의 버스'였습니다. 눈을 좀 붙일까 했더니 평택에 도착하여 8명의 회원을 태웠고, 아침 식사로 준비해온 김밥 배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배도 부른데 배 두드리며 자볼까 했더니 마이크가 켜졌습니다. 예전에 오락부장 보조였었는데 몇 년 만에 마이크 잡아본다는 오는세월님의 사회로 본 행사의 경과 설명과 회원들의 인사가 이어졌습니다.
경기남부(수원, 화성, 오산, 평택, 안성) 광장 내에 활성화되어 있는 산행반은 매월 셋째주 일요일에 정기 산행을 하는데, 원래 계획되어 있던 래프팅을 취소하고 봉화산을 가자고 등산대장님인 boram님이 제안을 해서 큰 행사로 확대된 데다, 마침 이 날 봉하 마을에서는 오리 농군 입식 행사가 있어서 첨맘님까지 참석하신다니 함께 자봉하게 되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신구의 조화가 완벽한 조합을 이룬 버스 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세대와 구세대가, 신입회원과 기존회원이 참 잘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들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깊은 가슴 속에는 길어도 길어도 모자랄 눈물의 우물을 모두 다 품고 있지만, “저렇게 어여쁜 신입회원들을 보고 어찌 웃지 않을 수 있느냐?”는 boram 대장님 말씀처럼 우리는 다시 희망을 노래해야지 않겠습니까? 활동 많이 하던 기존 회원들 입장에서 보면 매우 ‘파릇파릇한’ 20대 후반의 신입 여성 회원들은 참 이쁘고, 당당하고 멋진 모습들이었습니다.
용인에서, 안산에서, 화성에서, 평택에서, 수원에서 모인 40명 식구들의 소개는 휴게소를 한 번 들른 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계획은 일정 부분 수정이 가해졌습니다. 두 번째 휴게소를 들러 점심 도시락을 먹고 봉하 마을로 들어간다는 계획을 바꿔 휴게소를 들르지 않고 곧장 달려 봉하 마을에서 첨맘님을 만난 후 점심을 먹기로 한 것입니다. 11시 30분에 봉하의 행사는 시작되는데 그 시각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서였죠.
봉하로 달려 달려~.
달리는 동안 이번에는 동영상이 상영되었습니다. 노 대통령님 국민장 기간 동안 수원역 분향소에서 찍었던 사진을 편집한 것과, TV에서 방송되었던 내용을 받아온 것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훌쩍 훌쩍...... 그렇게 우리는 봉하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2. 오리 농군과 첨맘님
봉하 도착한 시각은 11시 20분경. 버스를 주차해놓고 마을까지 들어가는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습니다. 가져간 플래카드 펼쳐 들고, 애들도 있고 할머니도 계시는데 뛰어갈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봉하의 논에 도착하니 이미 파장 분위기였습니다. 오리들은 이미 논에 방류되어 있었고, 첨맘님을 비롯한 노 대통령님의 측근 몇 분이 오리 농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계셨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우리들은 뻘쭘해졌지요. 끼여서 얘기를 듣는 것도 여의치 않았고, 그저 첨맘님과 오리 농군 구경만 했다지요. 곧 마을 이장님의 방송 인터뷰가 이어졌고 아마도 첨맘님의 인터뷰도 예정되어 있는 듯 했습니다만, 우리는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르는 지령(^^)을 받고 이동했습니다. “여기선 할 일도 없는데 뭐하냐? 일하러 왔으면 언넝 점심 먹고 일할 준비 해야지!“ 누군가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몇 몇은 트럭에 올라타고, 몇 몇은 걸어서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이동했습니다. 준비해온 점심 도시락을 꺼내 네 줄로 줄지어 앉을 수 있게 배치했습니다. 어느 새 첨맘님도 와 계시더군요. “제가 차린 건 아니지만 많이 드세요”란 인사 말미의 말씀을 듣고 웃으며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저런 담화 속에 점심 식사를 다 하신 첨맘님이 다음 일정 때문에 일어서야 한다고 하시니 우르르 일어나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는 속에서 목소리 크시고 배려 깊으신 슈룹님이 외칩니다. “장관님! 여기 신입회원들이 많이 왔는데 같이 사진 좀 찍어주세요.”
오케이~.
“사진 찍을 분들 밖으로 얼른 나오세요.” 하시니 난리 났습니다. 도시락 다 팽개치고 몰려 나가 줄을 섰습니다. ‘하여간 너무 인기가 좋으셔서 클났어...’ 혀를 차며 슬그머니 저도 멀리 있는 아이들을 불러댑니다. "빨랑 오란 말얏! 장관님 옆에 서란 말얏! 우리도 찍어주세요!“
그리하야, 모두들 흐뭇해서 만족한 얼굴로 첨맘님을 배웅해드렸습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의 상황은 기사를 통해 보았습니다. 저는 몇 개의 기사에 나온 사진을 보다가 노짱님의 얼굴이 어른거림을 느꼈습니다. 첨맘님이 안고 계시는 오리를 보면서 말입니다. 떨어질세라, 꽉 잡으면 아플세라 조심조심 소중한 아기 다루듯 안고 계시는 첨맘님의 시선에서 늘 약자에 대한 따스한 사랑의 눈길을 보내던 노짱님이 오버랩된 것입니다. 두 분 다 참 좋은 사람들이죠. 이 좋은 사람들에 의해 친환경 봉하쌀이 어려운 농촌에도 경쟁력 있는 브랜드를 창출할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 되길 바랍니다. 농민의 아들로 농촌을 사랑하고, 환경보호에 매진하신 노짱님이 주신 선물이니까 잘 될 거라 믿습니다.

3. 정토원 참배
봉하의 오후 작업은 보통 오후 3시에 시작한다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4시면 올라와야 하므로 2시부터 하기로 하곤 1시간 정도 비는 시간을 이용해 정토원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봉하 마을에서 약 700m 떨어진 정토원 가는 길은 처음부터 경사가 심해 노약자들에게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만, 남녀노소의 끝없는 참배객들이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약 20분 걸려 정토원에 도착하니 참배를 위한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하얀 국화를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분이 법당 입구에서 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많아 위패가 모셔진 법당 안에서는 두 줄로 한꺼번에 참배했습니다.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 탓인지, 감정 조절을 잘 한 탓인지 미처 눈물 흘릴 겨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사분란하게 빨리 빨리 움직여 참배를 끝내고 다음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으니까요.


나와서 방명록을 작성하는데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떡을 나눠드리니 받아가라고 말입니다. 또 줄을 서서 따끈따끈한 백설기 한 덩이씩 받았습니다. 그 떡은 대구 시민광장 산행모임에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대구 광역광장, 북광장, 봉사모임에서 준비해주셨다는군요.
그러다 보니 경기남부 회원님들을 잃어버리고 우리 가족만 남은 것 같아서 부지런히 내려가다 첨맘님이 쓰신 <서울역 분향소에서> 글이 플래카드로 걸려 있는 걸 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울컥... .
올라갈 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 곳을 내려올 땐 들르게 되었습니다. 괜히 마음만 아플 것이니 돌아가자고 했건만 와인한잔님이 가는 바람에 얼결에 따라가다가 부엉이 바위 밑에 다달았고, 까마득히 보이는 위를 쳐다보는 순간 감정 조절은 더 이상 되지 않았습니다. 주저앉아 땅을 치고 싶었지만,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고 다들 감정 조절을 잘 하고 있는 터라 저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죽여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위를 쳐다 볼 수 없었습니다.


(↑구름빵님 사진)
4. 오리 펜스 만들기
오리 펜스 만들기.
초 6학년 딸이 명명한 작업 이름입니다. 사람이 많은 데다 애들과 여자들이 끼이면 오히려 걸리적 거리니까 남자들만 조를 짜서 작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자봉자들을 위한 쉼터가 있어서 애들과 어르신이 쉬기에 참 좋았습니다. 저도 쉬고 있다가 작업하는 사진을 몇 장 찍어 오려고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안 보여 들판을 한바퀴 돌았고 와인한잔님께 전화를 하고서야 아직 작업을 시작하지 않았으며 연못가 정자에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전에 뜨겁던 햇볕은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날은 흐려 있었고 바람이 몹시 불어 큰 키의 풀(억새인가요?)들이 요란하게 몸을 눕히고 있었으며 시원하다 못해 서늘해졌습니다. 가장 뜨거울 오후 2시 경에 날씨가 이렇게 바뀌었으니 노짱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일까요?


연못가엔 또 다른 자봉팀이 잡초를 뽑고 있었고, 정자에서는 작업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던 건데 제가 도착하니 조별로 작업 분담을 받아 곧 이동하기에 저도 금방 온 길을 다시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정자 마루 아래 푸대에 하얀 면장갑이 있는 걸 발견하곤 잽싸게 한 켤레 챙겨서 갔는데 면장갑이 있는 걸 모르고 그냥 나선 남자 분한테 넘겨버렸습니다.
한 쪽에서는 논을 빙 둘러 곳곳에 적당한 간격으로 쇠봉(쇠파이프)을 박는 작업을 했고, 이를 위해 boram님과 와인한잔님은 ‘봉이야~’를 외치며 봉 옮기는 힘자랑을 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이미 박아둔 봉을 거치대로 삼아 망을 치는 작업을 했습니다. 하나의 줄에 엮여 있는 망을 골고루 펴서 논의 사방을 둘러막는 작업이었는데 처음엔 우왕좌왕하다가 한 개의 논을 끝내고 나니 금세 전문가가 다 되어서 손발 척척 맞추며 아주 쉽게 일을 해치웠습니다.


그 사이에 하늘은 어두워졌고 몇 번 동안 빗방울이 떨어지곤 하면서도 우리의 작업을 위해 하늘은 잘 참아주었답니다. “이런 일 해봤능교? 부모님이 농사 짓는다면 이래 하시겠능교?”라고 우리의 작업을 감독하는 분이 묻더군요. 자봉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질문을 받진 않았지만, 작업하는 동안 내가주인님이 MBC 카메라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4시가 되어갈 무렵 빗줄기는 굵어졌고 많아져서 우리는 작업을 철수했습니다. 철수하는 와중에도 다른 팀이 마무리 짓지 못한 걸 보곤 후다닥 달려들어 삽시간에 끝내 주었습니다. 다들 농사꾼 체질을 타고났나? 남자 뿐 아니라 여자 분들도 어느 새 다들 맨발에 논흙을 잔뜩 묻힌 차림들이었습니다.
연못가 정자 옆에 있는 우물에서 시원한 물이 흘러나오고 작업자들은 얼굴, 손, 발, 신발 등을 씻었습니다. 작업에 참여하지 않으신 분들이 준비해온 막걸리를 한잔씩 마시며 기분 좋게 자봉을 마감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봉하 마을을 떠났습니다.




5. 봉하를 떠나며
오후 5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우리는 봉하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지만, 그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봉하 마을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힘들게 걸어오는 것을 보며 ‘도대체 이 추모 물결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의문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봉하 마을 ‘성지 순례’라는 표현을 쓴 데 대해 거부감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는 봉하 마을이 광주 못지않은 순례지가 될 거라고 믿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끊이지 않고 봉하를 다녀갈 것입니다. 민주화의 성지 광주와는 또 다른 많은 의미들이 부여되는 곳으로의 ‘성지’와 다름없는 곳이 되겠지요. 거기에 노짱님의 혼이 고스란히 녹아 있으니까요. 광주처럼(‘민주화의 성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봉하에 들어서면 길 양편에 쭈욱 전국에서 다 모인 듯한 근조 플래카드와 노짱님을 추억하는 플래카드들이 걸려있습니다. 우리도 돌아오는 길에 플래카드를 걸어두고 왔습니다. 이렇게 노짱님을 더욱 깊이 가슴에 묻고, 보이지 않는 먼 세계로 보내드려야 하는 건가 봅니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 앞에서 도 종환 시인님을 만났습니다. 보니 우리 버스 바로 앞에 <한국작가회의>란 이름을 달고 있는 버스가 있더군요.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그 분들은 서둘러 떠났고, 우리는 처음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버스에 올라타고 출발하니 소나기가 힘차게 쏟아졌습니다.



(단체 사진 - 구름빵)
p.s.
이번 행사를 준비하신 등산반 boram 대장님과 새벽하늘 부대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용인에서 오신 순수허공님과 까치님(+부군님), 수원에서 안산으로 이사가신 다사롬님(+부군님), 그리고 수원, 화성, 평택에서 오신 경기남부 회원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