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가 만개한 지금도 국민은 여전히 정치집단과 정치인들에 대하여 폭넓은 선택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정치수준은 그 나라의 국민의식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 모든 책임을 국민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바로 정치인들의 교묘한 행보가 국민의 눈을 가리고 선택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기득권 집단의 단결, 비기득권층의 분열
기득권 집단과 비기득권 집단을 나누는 것은 기준에 따라서 전혀 다른 분류가 될 수도 있는 모호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득을 기준으로 나눈 5분위중 상위 1분위에 해당하는 계층을 기득권층으로 보고, 2, 3, 4분위를 중산층으로 보며, 5분위를 빈곤층으로 분류한다면 무리가 따르지만 일반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경우 지니계수의 지속적인 악화로 기득권층의 비율은 20%보다 훨씬 낮습니다.
결국 정치싸움의 핵심인 전국단위 선거에 있어서 주요한 변수는 1분위와 5분위가 극단적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선택을 하고 나머지 60%는 대체로 3:3으로 나뉘는 것이 정상입니다. 유권자가 정치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투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선거입니다. 그렇게 선택하는 유권자의 구미에 맞춰서 정체성을 정하고 정책적 지향점을 만들어서 정직하게 제시한 후 많은 국민의 선택을 받아내는 과정이 바로 대의민주주의제도에서의 선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러한 계급적 이해가 정치에 전혀 투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층은 똘똘 뭉쳐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줄 집단에 대하여 높은 응집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기득권을 가지지 못한 나머지 80%의 유권자들은 응집력이 없이 분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치집단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가뜩이나 어려운 서민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기는 커녕 점점 기득권층의 이익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정치의 방향성을 만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일입니다. 서민들의 위기이자 실질적 내용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80%의 서민이 20%의 기득권층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2. 계급적 이해가 차단되는 원인
기득권층이 감세와 복지축소 및 무한경쟁을 주장하고, 비기득권층이 적절한 수준의 세금을 유지하거나 증세를 통하여 복지의 수준을 유지 또는 확대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주의 정치의 모습인데 그것이 전혀 안되는 현실은 결국 비기득권층의 어려움을 점점 확대할 뿐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첫째, 개발독재 시대의 후유증입니다.
우리 국민의 우편향이 극심한 편입니다. 개발독재 시기의 논리가 여전히 국민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개발독재의 혜택을 입지도 못하고 오히려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합리성이 떨어지는 개발독재의 시기야말로 신분상승의 기회가 많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국가의 발전단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따라가지 못할 뿐 아니라 여전히 땅을 파고 국가주도의 개발이 이루어지면 기회가 많아질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선성장 후분배론에 수십년을 속아왔으며, 개발독재의 후유증으로 외환위기를 경험했지만 여전히 경제는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이 경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째, 지역주의의 여전한 위력입니다.
지역에 따라서 극명히 갈리는 유권자의 선택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선거가 의미없는 일이 돼버립니다.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고려할 겨를도 없이 항상 지역감정에 충실한 투표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정당의 이름에 관계없이 영남당, 호남당, 충청당이 해당지역의 몰표를 받고 있는 현상은 유권자가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짖밟는 일이 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그러한 지역주의에 의하여 형성된 지역구도를 허물고자 노력하지 않고 그것에 안주하여 그것을 꿀단지처럼 향유하려고만 합니다. 사실상 정치인들이 거의 대부분 우리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역주의에 의한 투표는 정치인들이 굳이 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른 서민들의 편을 들지 않아도 되는 매우 편리한 도구입니다.
셋째, 기득권층은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기득권층에 속하는 점, 언론이 대부분 기득권층을 편들고 있는점, 각종각급의 생업현장에서 기득권층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소수이지만 대단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무한경쟁으로 기득권층의 이익이 늘어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하위계층에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고 있기도 한 것이 현실입니다.
넷째, 교육의 부재입니다.
대다수의 국민은 선성장 후분배론이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무한경쟁이 약자에게도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자연히 전체가 넉넉해지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릇된 경제관은 오늘도 여전히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서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레드컴플렉스를 은근히 부추겨서 복지나 분배정책은 공산주의자들의 불손한 주장처럼 왜곡된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다섯째, 민주화 세력에 대한 오해입니다.
대체로 우리 국민은 민주화 세력을 진보적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독재세력의 극우적이고 국가독점적인 정책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중도적인 포지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진보세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리버럴리스트가 훨씬 많았다고 보아야 합니다.그러한 민주화 세력의 집권을 10년 가까이 경험하였지만 서민들의 삶은 점점 어려워만 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이 극우세력과는 차별화된 점이 있지만 사실상 대부분 우파정치인입니다. 고학력에 명망가의 집안이거나 부유한 집안출신입니다. 당연히 국민의 의식을 넘는 어떤 진보적 정책도 취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세계화, 신자유주의, 외환위기의 후유증 등으로 점차 서민들의 고단한 삶은 피할 수 없었던 추세라는 점도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화 세력의 무능으로 인식되고 실망감을 확산시킨 부분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감소하지 않는 한 정치에 국민의 이해관계가 투영되기는 매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는데 하나로 뭉쳐있고, 비기득권층은 분열하여 저절로 기득권층의 이익에 종사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가지지 못한 절대다수의 국민이 점점 스스로 불행한 길을 선택하게 되는 메카니즘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3. 국민의 이해가 투영되는 선택의 장을 열어야...
결국 우리의 정치가 국민의 이해관계를 용해해서 적절한 위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선택의 대안이 다양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줄 정치세력을 선택하고, 어떤 이는 증세와 복지확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어떤 이는 현상을 유지하는 세력을 지지할 구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정치권이 판을 깔아두어야 비로서 국민의 선택에 대한 학습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남을 기반으로한 한나라당, 호남과 충청을 아우르는 서쪽벨트당이 만들어져서 지역을 기준으로 선택을 강요하는 정치는 국민에 대한 폭거입니다. 국민의 선택대안을 축소하였을 뿐 아니라 망국병인 지역주의를 확대재생산하는 일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심판을 받을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호남과 충청의 단합만으로는 결코 영남의 단합된 유권자수를 이기지 못합니다. 확고한 계급적 이해를 담아내거나 영남의 응집을 깨는 플러스 알파가 없이는 반한라당 연합만으로 그들을 이길 가능성이 없습니다. 차라리 대한민국 정치의 100초석을 놓는 심정으로 서로 정책에 따른 정치세력의 분화를 지금부터 확실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부에서 논의되는 대통합은 결국 국민의 다양한 선택권을 제약하고 지역구도가 아닌 다른 기준(정체성과 정책지향)을 제시하여 미래의 정치발전을 시작하는 초석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옳지 않습니다. 일부 정치인들의 정치장사에 유리한 구도를 찾아가는 일에 불과합니다. 선거를 이기기 위한 방법이라도 선거를 누가 이겨야 한다는 것이 진리로 정해진 것이 아닐 뿐더러 그렇게 아무나 다 모여서 이긴다 하더라도 누가 이긴 것인지도 모르는 의미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결국 또 다시 정치인들의 이익다툼에 곧장 분열되고 말 것입니다.
4. 사회적 투자국가를 지향해야...
지역주의에 기대지 않는 다양한 정치집단이 정책적 차이에 따라서 분화되고 정책을 기준으로 선택받는 것이 최선의 정치입니다. 시작은 별다른 성과가 없더라도 결국 가장 큰 발전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분화된 선택의 장이 열린다면 우리의 미래는 당연히 사회적 투자국가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 우선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과 극렬한 분배를 주장하는 세력이 설자리는 매우 협소해 집니다. 그 만큼 우리의 유권자중 적절한 중도적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성장론자들의 주장에 입각한 정책은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경우 서구의 복지국가들에 비하여 세율이 대단히 낮고 복지수준이 형편없습니다. 아예 복지정책이 없다고 보는 극단적인 주장조차 나오는 형편입니다. 당연히 복지확대가 없이는 더 이상의 성장조차 어렵습니다. 소득의 불균형 속도에 비하여 가처분 소득의 불균형은 훨씬 빠릅니다. 당연히 내수가 안되고 수출만으로 성장을 구가할 길은 없습니다.
서구에서처럼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복지는 꿈꿀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국방예산이 재정의 20%를 넘는 상황에서 복지에 투입할 재원이 모자랄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형편에 맞지 않는 과도한 복지를 욕심부리면 미래가 어두워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양극단은 저절로 선택대안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이념좌표상 우측의 끝에 서 있습니다. 좀 더 가운데를 향하여 이동해야 합니다. 적절한 수준으로 복지를 확대해야 합니다. 결국 실직자에게 직접 생활을 보장해주는 방식의 복지가 아니라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역량을 모아야 합니다. 앞으로 심각해질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자리를 늘리고, 젊은 층이 노인들을 보살피고,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도우며,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도와주는 국가서비스 부문에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확고히 지향해서 장기적으로 국방예산을 절감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 현대전의 특성상 60만 대군으로 인해전술을 할 일이 없습니다. 군을 좀 더 현대화 시키고 장병의 수를 줄임과 동시에 직업군인의 비중을 좀 더 높여서 그것이 또 하나의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직접 생활비를 지원해서 비효율을 만드는 방식의 복지가 아니라 사회적 일자리의 창출로 국민의 가처분 소득과 국가서비스의 확충을 동시에 겨냥하는 방향의 사회적 투자가 시작되어야 할 시점입니다.
그러한 정책을 지향하는 정치세력이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정책의 차이에 따라서 좀 더 조밀하게 분화되는 일이 지금 화급한 일입니다. 그러한 토양을 만들고 가꾸는데 대다수의 비기득권 유권자가 앞장을 서야할 때입니다. 정체성을 모를 인사들이 서로 선거연합만을 위한 정당을 만들고 국민을 지역구도에 가두고 속여먹는 일에 기만을 당해서는 안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