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의 대선구도를 놓고 많은 말들이 오고 갑니다. 정치판세에 둔감한 민초의 사견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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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적 사안에 대해 국민은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긴 흐름에서 보면 국민의 선택은 옳다.
이것을 바꿔야 할 시간이 왔다.
늘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국민이 필요하다. |
소비자는 영원한 바보가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한가지 설명하면... 소비자의 태도와 행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제랄드 잘츠만 (Gerald Zaltman)의 주장을 예로 들면...
“소비자의 브랜드와 제품에 대한 인식은 기억(memory), 은유/상징(metaphor)이 서로 짜여 형성된다. 소비자는 이것들을 매번 재구성하고 과거의 경험을 다시 살려내어 사용한다. 그러나 기억은 또한 은유/상징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생각과 경험을 대신하여 작용한다(역자註. 대체하거나 우선하여 작용한다). 브랜드 가치는 기억과 은유/상징 그리고 다른 소재들이 브랜드에 어떻게 기여하는 가를 통해 나타난다. 여기에 더해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며, 그 자체로서는 참으로 미약한 힘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나의 이론을 덧붙이자면, 사실과 경험에 대한 기억의 단편들이 최종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로서 남는다는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임팩트가 큰 경험들이 특정 브랜드에 대한 한 소비자의 지배적 이미지를 결정하는데 큰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서, 사람의 개별 기억의 힘은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소비자는 특정 대상의 가치를 인식하는데 있어 대상에 대한 지배적 기억(여기서 기억은 대표성 혹은 자극이 강한 기억)과 이를 상징화하는(정치사례. 청계천개발→추진력) 것 혹은 경향성으로 이미지화한다. 그리고 이것이 대상에 대한 다른 기억들을 대체하거나 우선하여 작용한다. 그리고 별 다른 강한 자극 요인이 발생하지 않는 한 이런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이런 이론이 신이 내린 정당 한나라당을 설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일천한 정치의식과 경험을 가진 이명박의 지지도를 설명할 수 있는 긍정적 이미지는 몇 개면 족하다. 추진력, 경제인, 새얼굴... 정도... 청계천, 버스노선개혁 등을 발단으로 하는 추진력의 이미지는 한나라당에서 그나마 대안을 찾아 보고자 하는 유권자들에게 입맛에 맞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는 영원한 바보가 아니다. 가끔 퍼뜩하고 정신을 차릴 때도 있다. 이제 부정적인 사건이 지배적 이미지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자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조악한 이미지에 근거를 두었다면, 후자는 탄탄한 사실에 근거를 (아직 검찰의 조사를 지켜봐야겠지만) 두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 만약 대선 전에 결과가 확실하게 나온다면 이건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대한민국 국민이 돌아서면 까먹는 꼬꼬머리라 해도 여기에 손을 들어줄 정도의 허접은 아니다.
사태를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 ‘사실 직시’
덧붙여, 앞서 노무현과 유시민의 말 많음이 대중의식의 진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런 역할은 정치인이 아닌 지식집단(언론포함)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보는데.. 제 역할을 망각하고 오히려 대중의 사고를 단순화시키는데 앞장서고 있으니 개탄스런 노릇이다.
흔히 말하는 노무현식 혹은 유시민식 접근방법은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예측 가능하다. 그래서 신뢰가 있다. 기억의 파편을 조직적으로 저장하고 선후관계에 대한 해석이 분명하며 사안을 꿰는 맥락구조가 선명하다. 시스템화된 사고체계는 처음에는 상당히 복잡해 보이고 거부감이 생긴다.
그러나 근력을 키우고 지구력을 키운 몸은 기초체력이 높아져 더 강도 높은 활동을 할 수 있듯이, 일상화된 상식적 사고체계는 더 복잡한 사안을 파악하는데 있어 집단의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이 된다. 이러한 태도와 사고방법은 바로 상식적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다. 역사의 진보는 뛰어난 철학적 발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이런 철학의 대중적 수용과 사고의 정도에 따른 것이 아닐까.
사태를 파악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사실 직시’이다. 1+1=2를 이해하는데 함수와 미적분을 들고 나올 필요는 없다. 1+1=5를 만들기 위한 찌라시 언론과 일무 무뇌 지식들의 성과는 대중의 사고 시스템의 정상 작동을 방해하는 바이러스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세일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검증 공방을 거쳐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들어서면 참여정부의 성과와 개혁 방향에 대해 서서히 국민들이 실체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날 기회가 올 것이다. 대중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전달되지 않거나, 베일에 쌓여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영원하지 않다.
게임의 상대를 알아야
다른 정치판을 보면... 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정치판을 게임으로 봤을 때 다른 여타의 스포츠와 달리 정치게임은 선수간의 피터지는 싸움 끝에 강한 자가 이겨 자동 승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승자에 손을 들어 주었을 때 승리가 확정되는 게임이다. 결국 심판은 국민이란 소리다. 세몰이로 큰소리 치다 심판의 결정에 나가 떨어진 사람이 한둘인가? 너무 단순해 보일 수 있겠지만, 이것이 기초 공식이다. 모든 복잡한 산술 공식이 나오더라도 기본 공식을 무시하고는 해결점이 없다.
현재 자칭 범여권 통합이 크게는 수구노선에 대적할 만한 개혁세력의 힘을 규합할 수 있는가 또는 국민에게 차별화된 강한 이미지를 줄 수 있는가, 그리고 작게는 열린우리당의 전망과 유시민의 자리와 역할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진짜 문제는 어디에 국민의 지배적 이미지를 결정할 힘이 존재하는가에 있다고 본다.
제각각 다른 정치공학적 주장들에 하나 더 얹어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바람이라는 것을 밝힌다.
지금 자칭 범여권 통합파들의 지지부진한 밀고당기기는 절대로 지배적 이미지 변화에 임팩트를 줄 꺼리가 못된다. 설사 여차여차해서 통합에 성공하고, 종이당이던 무어던 신당을 창당한다 치더라도, 개혁에 대한 열망에 부응할 만한 컨텐츠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자멸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개혁의 컨텐츠는 참여정부계승 + 알파 이어야지, - 참여정부는 성립이 될 수 없다. 참여정부의 정책과 개혁을 뛰어넘는 정당이나 대선후보가 얼마나 있겠는가? 국민은 알맹이 없는 거래는 하지 않는다.
이렇다 하더라도, 현재 여권의 움직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증과 조급증을 불러오기 충분하다. 제각기 지분을 놓고 줄다리기 하느라 허송세월 보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 이해찬 의원의 행보가 사람들 헷갈리게 한다. 내가 이해찬 의원이 아니니 이것이 전략적으로 어떠할 것이다라는 설레발은 못 치겠지만, 다만 바람이 있다면 적당히 밀고 당기면서 거리 두고 있는 게 현재로선 최선이라고 본다. 자칭 통합세력은 지지부진하다 자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면 긍정적 임팩트 꺼리도 없고, 이미지가 장기 기억에 남을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이걸 깨닫는 날이 바로 좌판 정리하는 날이 될 것이다.
내가 만약 유시민이라면...
그렇다면 유시민의 침묵 행진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것도 순전히 나의 상상에 근거하고 있으며, 아주 조심스런 주제가 되겠으나, 혹시라도 혼란스런 상황에 대한 심리적 안정?을 찾는데 작은 보탬이라도 된다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하고자 한다.
어떤 첨예한 사안에 대해 사람의 반응은 참으로 다양하다. 사안이 개인과 공공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그리고 개인의 역할과 자신의 이익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첫째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고, 둘째는 공동의 선이란 프레임 안에서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있고, 마지막으로 철저하게 나를 배제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많은 경우가 첫번째나 두번째에 해당한다고 본다. 적어도 이것을 우선 고민해 본다.
그러나 두번째의 반응에서도 다양한 정도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무자르듯 간단하게 규정짓기 어렵다. 두번째의 경우를 좀더 살펴보면,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 존중하나, 어느 정도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부류가 있을 수 있고, 또 공동의 선을 관철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을 찾고자 하는 이유로 인해 이 부류에 속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는 철저하게 나를 배제하는 경우에 집어 넣기 곤란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후자는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공동의 선을 관철하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는 부류의 형태는 외적으로 보기에 두번째의 경우나 세번째의 경우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자신의 역할론을 믿고 있으므로 세번째의 경우 (철저하게 자신의 몫과 역할을 배제하는) 경우라고 보기 어렵다고 하겠다. 그래서 두번째, 세번째의 중간에 끼인 반응 유형이라 볼 수 있다.
여기까지 설명이 길었다. 본론으로 가서... 그렇다면 이런 두번째와 세번째에 낑긴 유형의 사람들은 첨예한 이견대립이 있는 사안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첫번째, 제각각 이견에 대한 (공동의 선 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명분을 생각한다.
두번째, 제각각 주장이 가진 현실성을 생각한다.
세번째, 이견의 타협가능성을 생각한다.
네번째, 타협가능한 이견이 상기의 명분에 부합하는지 고민한다.
다섯번째, 타협가능한 명분이 현실성이 있는지 고민한다. 더불어 이 모든 행위의 과정이 어떠한 형태로든 공동의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나의 이런 개똥철학 같은 논리에 유시민을 가두고 싶은 의도는 없다. 그러나 내가 만약 유시민이라면 어떻게 할까... 라는 약간은 재미있는 상상을 하고 싶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범여권 통합이라는 위태로워 보이는 시도와 일부 친노세력의 행보는 정치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고 다소 혼란을 주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전략적 의견을 내어 놓는데, 사실 직시를 한다면 온갖가지 배제론으로 각을 세우고 있는 범여권의 통합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고, 여권의 대선바람을 전제로 했을 때 친노인사가 배제된 소통합의 경우도 결실을 맺기 어렵다고 본다. 사실 이런 의견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 드러날 거란 기대감 반 혼란 반으로 딱히 입장 정리를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을 놓고 본다면 어떤 형태로든 정치권뿐 아니라 국민 전체에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이나 혹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방향은 힘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스스로 자멸하게 되어 있다. 명분이 있으되 현실성이 없다면 방법을 찾는 노력을 해볼 수 있다. 또한 현실성은 크되 명분이 없다면 고민의 목소리도 내어 볼만 하다. 그러나 명분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것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정리해서, 링안에서 싸움이 국민에겐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현실에 심판자인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지 직접 소통하는 것이 진짜 게임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