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와 허수아비
1.
"근무 중 이상 무!"
손전등이 초소 바닥을 한번 비추더니 딸깍 소리를 내며 꺼졌다.
"그래... 근무 설만 한가?"
중대장은 내 옆에 서있는 진영이의 어께를 툭 치며 물었다.
"예!" 하는 외마디의 떨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문병장~ 전방 사주경계 잘 하고, 크레모어 격발기 한번 더 체크해봐. 그럼 수고해~"
"네, 수고하입쇼~! 단결"
나는 무전기를 둘러맨 따까리 정상병의 화이바 뒤로 버릇처럼 손을 올리며 경례를 날렸다. 손을 내리며 부동자세를 취한 진영이를 향해 찡긋 웃으며 M16을 Y자 걸개에 올리고 난 다음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면서 말했다.
"편하게 서라."
잠시 후 적막을 타고 왼편 초소 쪽에서 나즈막한 암구호 소리가 들려왔다.
"솔개"
"..."
2.
"그래, 그래가꼬 우예됐노?"
나는 어둠 속에서 진영이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 뒤로 그를 못봤어요."
지급받은 화이바가 더벅머리에 맞지 않는지 앞창을 잡고 좌우로 흔들고서 말을 이었다.
"그 다음 다음 날 친구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수소문해서 저희 집 전화 번호를 알았나봐요. 다급하면서도 울먹이는 소리로..."
얘기는 이랬다. 일년 전쯤 새 학기가 시작되고 고등학교 동창이며 같은 조선대학교 학생이었던 진영이와 친구는 술을 한잔하고 어스름해질 무렵 술도 깰 겸 술집서부터 걸어서 친구 집 근처까지 갔던 모양이었다. 그리곤 헤어졌는데 며칠 뒤 친구 어머니 전화를 받은 후 그가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경찰서에 행불 신고를 하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지만 결론은 다들 그렇게 여기고 싶지 않은 곳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한다.
삼.청.교.육.대.
"말이 많았죠, 어수선한 때라..."
초소 벽에 기대 선 진영이의 눈빛이 아직 덜 익은 전방의 봄기운처럼 싸늘하게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긴 침묵이 이어지고 말이 없어도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이심전심이 되어버렸다.
3.
화제를 바꾸며 무료한 근무시간을 달래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30분이 훌쩍 지나버렸다. 오른편 허수아비 초소를 지나 더 아래쪽의 근무조가 우리 초소 쪽으로 올라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밀어내기 시간이다.
"솔개"
"마중"
언제나 싱글벙글한 사람좋은 하나포 사수 최병장이 학생을 앞세우고 초소 안으로 들어섰다.
"어허~ 군기봐라, 군기. 고참보고 경례도 안하지."
"아이고 행님 행차하셨능교, 당결! 문디 자슥, 말년에 군기는 무신... 나중에 보자. 수고해라"
턱끈을 이용해 탄띠에 달린 수통 주둥이에 화이바를 덜렁덜렁 달고 있던 입대 동기 최병장이 거치
대에 소총을 올리고는 천천히 화이바를 눌러 쓰면서 중얼거렸다.
"문병장~ 나중에 대기 초소 나갈 때 라면물 좀 올려놔 줘~"
M16을 거머쥐고 수류탄 2발이 든 나무통을 어깨에 걸치며 초소 밖을 나섰다.
갑자기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3류 영화관이었지만, 영화를 무척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영화관엘 갔는데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항상 내가 앞장섰던 생각이 났다.
그 시절엔 가로등이란 아예 없었고 외진 길을 걸을 때는 가끔 뒤에서 귀신이라도 나타날까봐 무서움에 떨곤 했었다. 그렇다고 남잔데 싶어 아버지 손을 잡고 나란히 걷긴 싫고 뒤따르자니 무섭고 해서 곧잘 앞서서 잰걸음으로 걸었는데, 든든하신 아버지가 뒤에 계시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놓였다.
그 생각이 나서 녀석을 앞세우려고 하는데 그는 자꾸 뒤따라가고 싶다고 오히려 나보고 앞장 서 달라고 했다.대부분 어두운 길을 갈 땐 뒤보다 앞장서는 것이 덜 무섭고 편한데 이 친군 자꾸 뒤따라오고 싶어했다. 한번도 걷지 않았던 철책 능선을 따라 그것도 초저녁 근무 투입 전에 보았을 붉은색의 '지뢰' 표지판이 생각나서라도 앞장서 가기가 심적으로도 부담이 있었으리라.
"솔개"
안상병의 작은 목소리가 북쪽의 대남 방송 스피커 소리에 묻혀 작게 울렸다.
"마중"
초소 안에 들어서자 장비를 챙기던 M60 사수인 안상병이 '단결'하면서 경례를 한다. 그리고는 M60과 탄박스를 들고는 옆에 있던 학생에게 고개짓으로 따라오란 시늉을 하고 초소 밖을 나섰다.
대충 초소 정비를 마치고 나는 진영이에게 왜 뒤따라오고 싶어했는지, 보통 사람들은 앞장서 가면 마음이 편하고 덜 무서워하더란 얘기와 어릴 적 영화관과 아버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예, 압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진 그의 신체적 장애를 듣고 나서야 나의 배려가 오히려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야.맹.증.
왠지 모를 슬픔을 지닌 듯한 그의 눈이 야맹증에 걸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려왔다. 어둑어둑해진 저녁 친구와 헤어졌을 때, 그는 더 이상 친구처럼 걸어서 집까지 가지 못했으리라. 친구의 행불을 알고 난 후에도 그는 자신이 친구처럼 걷지 않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것과 어쩌면 그 이유로 친구를 잃어버리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대기 초소에 들러 야식으로 라면을 먹고 희미하게 동이 틀 무렵까지 우리 두 사람은 별로 말이 없었다. 다만 중간에 내가 남동생이 없으니 진영이 너를 동생 삼고 싶다는 얘길 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나를 향해 웃음을 지어준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그날 아침 취침 전에 나는 소대장을 만나서 근무 파트너인 진영이가 야맹증으로 야간근무 서기가 매우 어렵다는 얘기를 전했고 소대장은 중대장께 보고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근무가 열외되었고 그 다음날 아침 진영이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이틀간의 병영훈련을 마치고 철책을 떠났다.
4.
그리고 두 달 뒤.
제대를 한 나는 고향 부산에 내려가 어머님께 큰절로 제대 신고를 한 후, 여행을 하고 싶다는 핑계로 며칠 뒤 전라남도 광주를 향해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문을 내려서자마자 크게 쉼 호흡부터 했다. 낯선 광주의 후덥한 7월의 기운이 코에 스며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나는 4년 전 이곳 광주에서 일어난 상흔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겉모습은 부산이나 광주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이곳 어디쯤에서도 낭자한 선혈과 울음소리, 총성과 아우성이 뒤덤벅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소묘
자전거 내달리고
포니 택시와 버스 크락션 소리
꼬맹이 손잡은 아주머니 불안한 잰걸음
교모 삐딱하게 쓴 한 무리 학생들 달려가고
서류든 아가씨 샌들소리 요란하게 뛰어간다.
도회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장면들
그 날
광주는 일시정지 되었다.
빛고을이 아니라
차라리
피로 물든 이승의 맨 마지막 방이었다.
광주에서 다시 나주(羅州)로 가는 직행버스로 갈아탔다. 이것이 나와 전라도 땅과의 첫 인연이 되었다.진영이 병영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지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나의 안부와 제대 일자 등등을 물어왔고,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께 여차저차 말씀을 드렸더니 내가 제대하면 나주에 한번 찾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후 나는 제대하기 전까지 그와 두 서너 번의 편지로 우정을 다져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엔 그의 조그마한 사진을 동봉하면서 혹시 얼굴 기억 못하실까봐 보낸다는 그의 배려에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었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앨범엔 그가 보낸 편지와 흑백 증명사진이 있다.
시외버스 터미널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편지에서 알려준 전화번호를 돌렸다. 이내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고, 그의 어머님이라 짐작하고 인사를 한 후 진영일 바꿔 달라고 부탁드렸다.잠시 후 터미널 전화박스 앞에서 만난 녀석의 얼굴을 대하자 잠시 어색한 순간이 흘렀지만 곧 반가운 마음에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시외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집이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영이 어머님께선 그야말로 버선발로 나를 맞이하였다. 도대체 이 녀석이 어떻게 말씀드렸기에 단 하룻밤 철책의 인연인 부산 놈을 이렇게 대해 주실까 싶어 한편 당황스러웠다. 차려 온 다과를 먹으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특히 진영이 어머님은 나의 가족 사항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하셨다. 미루어 짐작해 보니 아마도 내가 무척 마음에 드셨나 보다.

저녁이 되자 그의 아버님도 돌아오셨고 무엇보다 놀란 것은 진영이가 얘기한 적도 없었던 그의 누나가 들어왔을 때였다. 서로 인사를 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향해 키가 나보다 약간 커 보이는 그의 누나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동생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부산 분이라던데, 맞아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편히 앉으라는 아버님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고서야, "예..." 하는 내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난 다음 이런저런 얘기 중에 그의 누나가 대뜸,
"전 졸업반이에요, 수학과죠. 혹시 사귀는 여자 있나요?"
너무나 급작스럽고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나를 보고 재미있단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의 어머님이 또 한번 나를 놀라게 하였다.
"전라도 여자를 어떻게 생각해?"
그때서야 그의 어머니께서 나의 가족관계를 꼬치꼬치 물었었는지 짐작을 했으나 나는 그저 허허거릴 뿐 아무 대답도 못했다. 그날 밤 진영이와 나는 형제처럼 한 이불을 덮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한 얘기와 잃어버린 친구의 얘기는 내 입 언저리에만 머물 뿐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5.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나는 그의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렸다. 잠시 기다리라는 그의 어머님 말씀에 아버님께서 나주 특산물이라면서 배를 한 상자 들고 오셨다.
"어머님께 갖다 드리게."
나와 진영이 그리고 그의 누나와 함께 광주로 나갔다.
고속 터미널에서 부산행 버스를 탈까말까 무척 망설였다. 금남로를 밟아보고 싶었고 조선대학교도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진영이의 친구와 광주의 아픔을 그들에게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 죄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매표소로 발길을 돌렸다.
그래, 내 기억 속의 광주와 전라도는 이만큼만 가슴에 묻자. 마음이 따듯하고 아무 거리낌없이 부산 놈을 맞이해 준 그런 곳으로 기억하자.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의자에 기대어 차창 밖을 바라보았을 때 진영이 누나는 내게 아쉬운 눈빛을 보내왔다. 일순 당황했지만 시치미를 떼고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갈 때까지 차창을 사이에 둔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그것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광주 방문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 나는 경상도니 전라도니 하는 저급하기 짝이 없는 '지역주의'라는 말장난을 싫어하게 되었다.
오늘따라 휴전선 철책 어딘가에 근무서고 있을 녹슨 철모와 허수아비, 그리고 내 허리춤 탄띠를 잡고 뒤를 따라오던 진영이에 대한 추억이 자꾸 아른거린다.

PS
'화려한 휴가' 영화 소식을 접하니 그 시절이 떠올라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