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역사는 흐른다.”는 말이 있다. 장편소설의 제목이긴 한데 보통명사처럼 사용된다. “흐른다.”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역사라는 것은 거대한 강물과 같기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이 강물처럼 지나가 버리고 나면 실체가 없어진다. 분명히 존재했던 역사라는 실체는 이제 눈으로 다시 볼 수도 없고, 더이상 손으로 만질 수도 없게 된다. 역사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장구한 역사의 고증은 기록된 문서로 확인할 뿐이다. 최근에는 겨우 100년 남짓 기간 동안만 영상과 사진을 통해 현장감 있는 역사의 모습을 담아낼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피부에 와닿지는 않는다. 내가 모르는 시간과 장소에서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50년간의 대한민국 역사만을 되새겨 보려 해도, 막상 손에 잡히는 역사의 실체는 없다.
4.19와 5.16 군사쿠데타,
박정희 군사독재와 10월 유신,
10.26과 5.18 광주항쟁,
전두환 학살범의 집권과 지역주의 확산,
6.10 항쟁과 6.29 선언,
후보단일화 실패와 3당 야합,
군정종식과 11.21 IMF 구제금융 신청,
6.15 선언과 2002 월드컵,
미선,효순 촛불 집회와 12.19 승리,
열린우리당 창당과 3.12 대통령 탄핵,
4.15 총선과 열린우리당 탈당.
지난 50년간의 시간이 이렇게 지면 위 5~6줄로 정리될 정도로 실체가 없는 것이 역사다. 역사란 그런 것일까? 지나고 나면 실체가 없다. 남는 것은 기록일 뿐이다. 선명한 사진과 영상을 통해 그 날의 기억을 되새길 뿐이다.
아니 그런데!, 되새기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나 같은 사람들, 그 날의 기억들이 전혀 없는 사람 말이다. 그 날 그 장소에 함께 있지 못한 사람들. 즉, 그 날에 아직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문을 통해서, 사진과 영상으로만 지켜봤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 날들은 역사가 아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그들이지만, 그들의 기억은 역사가 아니라 신문 속의 뉴스와 칼럼이며,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된 사진과 영상의 한 장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는 그것이 역사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추억할 수 없는 현장은 역사가 아니다. 다만 기록에 대한 기억일 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추억
추억이란 과거와 연속선상에 있는 현재의 기억이다. 현재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항상 추억과 함께 하고 있다. 내가 추억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추억하는 시간과 공간이 모여 지금 나라는 사람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나를 추억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현재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내가 만나 즐겁고, 나를 만나 신나는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는 추억이다. 추억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름답고 귀한 보석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인생을 살고, 그래서 나의 삶이 되고, 그들은 나의 이웃이 된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거나 바꾸고 싶은 추억도 있지 않을까? 불행했던 일들과 죄의식,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들, 순간적으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내 인생마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들, 꼽으라면 누구나 몇 가지 스치는 추억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영화에서나 구성이 가능한 일이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일을 소재로 영화화 한‘나비효과’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이 영화의 주제는 순간의 선택이 한 사람의 인생 혹은 그와 관련된 주위 사람들의 인생을 얼마나 다르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묘사한다.
영화 ‘나비효과’에서는 단기기억상실증이 있는 주인공에게 정신과의사는 매일 일기를 쓰라고 처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성장하면서 몇 번의 단기기억상실증을 경험한다.
주인공이 성장한 뒤 어렸을 때 자신이 적은 일기장을 우연히 읽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던 순간들의 기억을 바꾸면(영화에서는 일기장에 적은 기록을 바꾼다) 현재 주위 사람들의 인생이 달라짐을 경험한다.
처음에는 불행을 겪는 어린 시절 사랑했던 여자 친구의 인생을 바꾸어 주려 한다. 그러나 여자 친구의 인생은 행복하게 바뀌는 대신에 자신의 선택 때문에 자신의 주변 사람들은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은 한 순간의 선택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고,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 사랑했던 여자 친구와 만나는 기억을 바꾸어 놓는다.(영화에서는 역시 일기장에 적힌 기록을 바꾼다)
영화는 결국 전혀 모르는 사이로 성장한 두 사람이 거리에서 옷깃을 스쳐도 그냥 지나치는 관계가 되었음을 보여 주면서 끝을 맺는다.
물론 비현실적인 상황을 영화에 담은 내용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현실적 상황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사람들을 최근에 많이 보게 된다. 과거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까지 했던 사람이 자신의 기억을 바꾸어 놓았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기억이 바뀌었는지 갑자기 민주평화개혁세력으로 자칭하며 민주신당에 떡하니 앉아 있다. 누구긴? 손학규 말이다. 그 밑에서 꼬리 흔들고 있는 정봉주는 도무지 종자를 모르겠다. DNA 검사를 해봐야지.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역이었던 이들도 기억을 바꾸었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기억이 모두 바뀌었는지, 탈당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란다. 단물은 쪽쪽 다 빼 먹고, 이미지 정치와 굼태의 극치로 달리다 이제 먹을 것이 다 떨어지니 개잡탕이라도 먹을 볼 모양으로 민주신당에 떡 하니 앉아 있다. 누구긴? 정동영과 김근태 말이다. 결국 영달과 세균의 삽질까지 보게 되네......
걔네들은 일기장을 꼬박꼬박 썼나 보다. 추억이란, 일기장에 적힌 기록을 바꾸기만 하면 다 바뀌는 줄 아는 모양이다. 열린우리당이라는 이름을 역사속에서 지워 버리면 참여민주주의도 깡그리 사라지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런데 현실은 영화가 아니라는 것, 그 날들의 추억은 역사의 현장에 함께 했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추억을 역사로
2007년 8월 18일은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이 날은 2007년 12월 19일 만큼이나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이날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열린우리당의 전당대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참여민주주의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소비자 주권을 선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동시대를 살았던 분들 중에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났더라도 그 현장이 만감이 교차되는 기억이 저장된 지워지지 않는 슬라이드 영상으로 남는다.
그렇기에 그러한 역사적 날들의 고증은 기록된 문서가 아니라 사람에게서만 확인될 수 있다. 취사선택한 영상과 사진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말을 통해 증명된다. 데스크의 검열을 통과한 기사와 사설이 아니라 현장의 추억을 가진 이들의 기록으로 역사를 증언하게 된다.
4.19 현장에서 총을 쏘았던 경찰과 총알이 박힌 친구를 들쳐 업었던 아버지 세대들과, 군사독재 현실에서 방공을 외치며 잡아 가두려던 사람들과 그들 앞에서 입조차 뻥긋하지 못했던 10월 유신 세대들과, 5.18 현장에서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군복을 입은 학살자들과 그들의 총칼 앞에서도 도청을 지키고 지켜봤던 선량한 광주 사람들.
6.10, 체육관에서 박수를 치며 최류탄을 쏜 사람들과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던 직선제 쟁취 세대들, 3당야합에 박수치며 찬성했던 사람들과 주먹을 불끈 쥔 손을 올리며 반대를 외쳤던 노무현, 11.21, 정경유착에 배불렀던 사람들과 IMF 구제금융으로 줄도산, 해고, 파산을 경험했던 사람들,
2002년 월드컵, 재벌도 축구협회장만 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이루지 못한 꿈을 꾼 정몽준과 모두들 붉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꿈이 이루어진 현장에 함께 했던 국민들,
겨울 아스팔트는 차가웠지만 미선,효순을 위해 촛불을 든 사람들의 또 한 번 꿈이 이루어진 12.19의 승리, 3.12, 대통령을 탄핵한 사람들과 광화문을 가득 메웠던 노란 촛불을 든 사람들, 4.15 총선에 열린우리당을 선택한 사람들과 열린우리당을 발로 차버리고 탈당한 국회의원들.
그 날, 어떤 이유에서든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고, 그 자리에 참여했던 분들에게는 역사란, 추억 속에 실재하는 기억이 된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지면 위에 5~6줄로 정리될 수는 결코 없다.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규정될 수 있도록 역사는 그 사람의 추억 속에 함께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2007년 8월 18일, 그리고 2007년 12월 19일. 이 날들은 분명 역사가 될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거대한 강물과 같기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후회하지 않도록..
쓰린 마음으로 기억되지 않도록..
지우고 싶고, 바꾸고 싶은 기억이 되지 않도록..
그렇게 간직하고 싶은 신나고 즐거웠던 영상처럼..
내가 후원한 돈과 흘린 땀이 나의 추억이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역사가 되도록 하자. 적어도 연말까지는 시민광장에서 분홍 장미꽃을 피우도록 하자.
사람 사는 세상
함께 사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