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당의장 선거에 출마한 유시민 의원이 연일 열린우리당 안팎에서 공격당하고 있다.
바야흐로 유시민 수난시대가 시작된 듯하다.
기득권 세력의 입장만을 성실하게 반영해주면서 유독 개혁적 정치인들만을 골라서 당선무효형을 때리고 있는 사법부는 유시민에게서 국회의원직을 박탈하려고 벼르고 있는 듯 하고, 열린우리당 동료 의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유시민을 공격하고 있다.
“유시민은 안된다”라는 문희상 의원의 발언에 이어 정청래 의원이 국내 최대 정치 웹진 서프라이즈 사이트 게시판에 나타나 뜬금없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더니, 이어 송영길 의원이 공중파 토론에서 야비한 마타도어를 하기에 이르렀고, 김현미 의원은 이를 받아 유시민을 지지하는 의원은 다섯 명도 안될 것이므로 당의장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고, 임종석 의원도 앞서 그 의견에 동조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마치 나폴레옹을 막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던 19세기 유럽 열강의 오만한 군주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인터넷은 이들을 성토하는 분위기로 달아올라 있지만, 정작 공격당하고 있는 당사자인 유시민의원은 묵묵히 얻어맞고만 있고, 최소한의 방어도 하지 않고 있다. 때리면 때리는대로 맞겠다는 식이다.
이들은 왜 이렇게 유시민 죽이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열린우리당 당의장에 출마하고 있는 당의장 후보들의 몇몇 캠프에서 유시민을 예선에서 탈락시키기 위해 전략적 배제투표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유탄은 신기남 전당의장에게 날아가 그를 무참하게 쓰러뜨렸고, 유시민은 살아남았다. 그러자 무엇인가 다급해진 것일까? 반유시민 신성동맹은 빠르게 가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방식은, 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던지며 싸웠던 그 사람들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야비한 것이었다.
정작 이 신성동맹의 수장 격인 문희상 의원은 “유시민은 안돼”라고 굵직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준 뒤, 팔짱을 끼고 앉아 있고, 젊은 임종석, 정청래, 송영길, 김현미 의원 등이 행동대원으로 나서서 유시민을 공격한다. 유시민이 당의장이 되면 “큰 일이 날 것”, 즉, 당이 쪼개질지도 모른다는 협박성멘트조차 발설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반 유시민 신성동맹의 주된 논리 : 유시민은 분열적 개혁주의자, 즉 위험한 급진주의자이다. 유시민은 비토 세력이 많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았던 논리 같지 않은가? 수구 기득권 세력이 김대중을 쫓아내기 위해서 주구장창 써먹었던 논리. 김대중은 빨갱이다, 김대중은 비토 세력이 많아서 안된다. 이 두 가지 언표는 두 겹의 정치적 상징기제를 작동시킨다.
기표(記表)는 이중의 기의(記意)를, 그 모호성을 가능한 한 의도적으로 부풀리면서, 정치적인 게임의 장에다 풀어놓는다. 팩트는 없다. 단지 부풀려진 가짜 기표가 있을 뿐이다. 김대중은 위험인물이므로, 우리 사회의 불안요인이 된다. 게다가 그는 힘센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으므로, 우리 사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협조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김대중을 지지한다고 해도, 그를 통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
그런데 너무나 흥미롭게도 김대중 죽이기에 이용되었던 이 데마고기를, 송영길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정통개혁주의자>(이 말은 김대중 문파에서 정치에 입문한 계보를 지칭한다. 21세기 벽두에 우리는 문파 소속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개혁을 할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를 검증받아야 한다는 중세기적 멘탈리티를 목도하고 있다.
개혁할 거면, 문파의 도장을 받아서 해야 한다. 개혁을 주창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반개혁적 언술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고, 그 언술에 대해 아무런 자의식의 균열도 겪지 않는 것이 우리 나라 정치인들의 의식 수준이다)들이 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들의 상처가 되었던 칼을,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자를 향해 날리는 광경을 우리는 무참하게 지켜보고 있다. 대체 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민주화를 위해 투신했던 것일까? 게임의 법칙조차 제대로 준수하지 않을 거였다면?
전혀 맥락이 다른 문제를 <김대중>이라는 막강한 기호 곁에 억지로 붙들어매어서 호남의 지역 감정의 수혜를 보려는 송영길 의원의 행태 앞에서는 말문이 막혀 버릴 지경이다.
특정인을 게임의 장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이 모호성의 데마고기, 가짜 언술이 김대중 시절과는 다른 전선으로 타격지점을 이동시켰다는 점은 주의를 요한다. 그 전선이 어떻게 이동했는가를 살펴보면, 유시민이 어느 자리에 서있는가가 분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가 어째서 개혁 아젠다를 선점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가 선명해진다. 한국사회 전반을 향해 발설되던 그 데마고기는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들과 당원들을 대상으로 발설된다. 유시민이 서있는 정치적 지점이 바로 그 지점이다.
소프트웨어 교체 작업. 정당개혁. 당을 국회의원의 손에서 당원들의 손으로 옮겨가기. 반유시민연대는 그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정치를 쥐락펴락 하던 시절의 편한 정치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유시민 의원과의 이런저런 개인적인 갈등에 의해 반유시민 전선에 가담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언표로 구성할 방법은 없다.
유시민을 배제시키고 당권파에게 힘을 실어줄 경우, 모든 정치문제를 원내 문제로 파악하고 있는 당권파를 통해 정당개혁을 실현할 가능성은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심리적 동기에 의하여 유시민 때리기에 가담하고 있는 정치인들은 추후에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데마고기는 원내와 원외 양쪽을 향해 다른 기의를 발설한다. 원내용 : “얜 형님한테 찍혔어. 그러니까 얘랑 놀지 마, 알았지? 걔한테 힘 실어주지 말란 말야. 국회의원 생활 편하게 하고 싶으면 알아서 해.” 왼외용 : “니덜이 아무리 얘를 이뻐해 봐야 소용없어. 우리가 협조하지 않을 테니까. 니덜 우리사회 개혁하고 싶지? 그런데 걔가 당의장 되면 당이 깨질지도 몰라. 당이 깨지면 누가 개혁하지? 힘없어서 당하는 거 지겹게 봤지? ”
위험인물로 딱지붙여서 왕따시키기. 기호학적 사기술. 인간이 지구상에 살아온 이래로 변화를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기득권 세력은 언제나 이런 기호학적 사기술을 이용해 딱지붙이기를 해 왔다. 그들은 존재가 언어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존재를 규정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던 것이다. 물론 워딩은 훨씬더 순화되기는 했다. “빨갱이” 대신 “분열적 개혁주의자”로 바뀌기는 했으니까. 그러나 정치적 효과는 똑같다. 위험인물이므로 일찌감치 배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누구에게 위험한 인물일까? 유시민이 한 대 얻어맞을 때마다 그의 후원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개미들은 유시민이 당하고 있는 수난을 즐거운 게임의 코드로 전격적으로 전환시키면서, 점점더 그에게 올인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마치,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당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었을 때 개미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것처럼.
유시민이 주장하는 내용 중에 이른 바 “급진적”이며 “분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되어 있는 사회에서라면 지극히 상식적인 가치들을 구현하기 위한 정치적 내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급진적”인가? 당의 의사결정구조를 진정한 상향식으로 바꾸겠다는 것이 “급진적”인가? 대체 무엇이 “급진적”이며 “분열적”이라는 말인가? “분열적”이란, 철저하게 원내 역학 구도를 말하는 듯한데, 대체 유시민을 지지하는 국회의원이 다섯 명도 되지 않는다면서 무슨 “분열”을 걱정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원내대표와 당의장의 역할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의장은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당원을 대표하는 자리이다. 그 동안 정당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당원들에게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당원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당의장이다. 그러한 그런 방식으로 당을 개혁할 생각이 없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민주당을 부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는가?
특정인을 왕따시키고, 자신들에게 돌아갈 권력 지분을 공고하게 만들 생각만 하고 있는 “무늬만 개혁주의자”들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 유시민은 권력이 시민에게 돌아가는 진정한 권력 형태의 변화를 위해서 몸을 던졌고, 그리고 그 노력은 온갖 미움과 질시를 받으면서도 중단되지 않았다.
네티즌들은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면서 그의 진정성에 설득당한 것이다. 그가 네티즌들을 비롯한 개혁적 성향의 유권자들에게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네티즌들은 멍청이가 아니다. 그들은 지난 수 년 동안 무서운 속도로 매우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회로를 구축해 왔다. 그 회로를 통해 정보들이 취합되고 정보들에 대한 분석 방식이 공개적으로 그 정합성을 시험받고, 정합성을 증명받은 분석 방식은 보이지 않는 “시민의 뇌”를 통해 선택된 뒤, 지식 구축의 회로에 들어간다. 이 대중적 지식의 육체는 아주 빠르고 기민하게 움직인다.
이 지식의 육체는 유시민이 선동해서 그에게 선동당하여 유시민을 지지하는 바보들의 생각 없는 육체가 아니다. 오히려 시민들이 유시민을 징발한 것이다. 글쓰면서 게으름이나 피우고 싶어하는 섬세하고 명민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이 행복한 개인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그를 끌어내어 부려먹고 있는 것이다. 소위 <개혁>을 주창하면서, 현재 대한민국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대해 그토록 무지하다니, 걱정스럽기 이를 데 없다.
유시민이 당의장에 당선되든 그렇지 않든, 반유시민 연대에 섰던 국회의원들을 유권자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수동적인 정보의 수신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정보를 분석적으로 선별하고 취합하는 단계를 벗어나, 정보를 생산해 내는 단계로 들어가 있다. 그들을 우습게 보지 말라.
유시민을 부려먹고 있는 개미들의 반란은 이미 시작되었다. 혹시 유시민을 두들겨패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하방경직성”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한번 상승을 경험한 정신은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왕따 노무현을 대통령 자리로 밀어올린 시민들이다. 그들은 결코 뒤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노무현이 그랬던 것처럼, 유시민 역시 그들에게는 하나의 효과적인 상징에 불과할 뿐이다. 노무현의 몸통, 유시민의 몸통은 한번 도약을 맛본 시민들의 집체적인 육체이다. 그런데, 그 육체는 “말하는 육체”, 사유의 매체인 육체이다. 바스티유는 무너졌지만, 국회의원 나리들은 앙시앙 레짐을 조물락거리고 있다.
우리는 1789년 프랑스의 민중처럼 곡괭이를 들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육체 안에 사유를 집적해 넣는다. 당신들이 유시민을 때리면 때릴수록 사유를 집적해넣은 그 육체들이 앙시앙 레짐의 벽을 들이받는 에너지도 높아진다. 얻어맞으면 얻어맞을수록 유시민의 상징적 가치는 올라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를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