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주의가 해법일까?
이글은 이미 1년 정도전에 올라온 글입니다.
어쩌면 이명박은 정운찬이 해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며, 정운찬도 내가 해법이라고 하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정운찬이 자기의 이론을 접는 것이 아니라면(물론 이 이론도 아래의 글에서 틀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명박과 그를 지원해주는 아이들과 분쟁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도대체가 어떠한 정책목표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를(강부자 고소영을 위한 다는 것은 알듯합니다.) 정권에 명망이 자자한 학자가 섞여서 과연 어떠한 짬뽕을 만들게 될지 사뭇 궁금합니다. 설마 케인스주의적 사고로 4대강 사업을 해석할려고 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것은 정운찬의 지난 인터뷰에서 "4대강 사업은 무조건 반대만 할 사안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에서 이명박이가 정운찬의 논리를 이용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당히 인기도 있고, 4대강 사업도 할 수 있겠고... 충청도이고... 뭐 지금으로봐서는 정운찬을 선택한 것은 이명박의 입장에서는 최선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정운찬이가 정답도 해법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설명이 아래의 글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래의 글에 대한 다른 분들의 좋은 설명과 의견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케인스주의가 해법일까?
정성진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작년 여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이번 세계경제 위기는 1980년대 이후 득세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위기라고 흔히 이야기한다. 또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정부의 시장 개입과 규제 강화, 국유화 조처가 확산되자, 신자유주의 시대는 종언을 맞이했다고도 한다. 아울러 오늘날 경제위기에 대한 처방은 케인스주의로 복귀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케인스주의적 분석과 처방은 이제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 정착한 듯하다. 예컨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자유주의를 전도했던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 타임스>와 같은 주류 매체들이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고 개종 선언을 한다든가, “지금은 케인스적 처방을 요구하는 케인스적 상황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위기에 대한 케인스적 진단과 처방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부정확하고 부적절하다. 우선, 이번 세계경제 위기는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것이 아니라, 그 훨씬 전인 70년대 이후 이윤율의 장기저하에서 비롯된 장기불황의 연장선상에서 폭발했다.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는 70년대 이후 장기불황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으로 출현한 것으로서, 이는 금융화, 사유화, 세계화 및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 강화를 통해 불황을 타개하려는 전략이었다. 신자유주의 전략은 이윤율의 장기저하 추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쌍둥이 거품(닷컴 거품과 주택 거품)에서 보듯이, 일시적인 거품 호황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70년대 이후 장기불황 추세 속에서도 30년대와 같은 대공황에 빠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럭저럭 굴러올 수 있었다. 2007년 미국의 주택 거품 붕괴에서 시작된 오늘날의 세계경제 위기는 이제 거품 키우기를 통해 대공황의 도래를 지연하려는 신자유주의 전략이 먹혀들지 않게 되었음을 입증하는 사태이다.
오늘날 세계경제 위기 국면에서 케인스주의가 부활하는 배경에는 케인스주의 덕분에 자본주의가 30년대 대공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는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30년대 대공황은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영구 군비경제와 대량의 자본 파괴를 배경으로 한 이윤율의 상승과 함께 종식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 자본주의 주요 국가가 적자재정을 중심으로 한 케인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채택한 것은 1970년대 이후 장기불황이 시작되면서부터인데, 이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촉발하여 신자유주의로의 정책 전환으로 귀결되었다. 경제위기의 문제를 유효수요의 부족이나 금융 불안정성과 같은 유통과 금융의 문제로 파악하는 케인스주의로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내적 모순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이윤율 저하에서 비롯된 경제위기를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늦출 수 있을 뿐 근본적으로 해결하거나 완화할 수 없다.
오늘의 세계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의 특정한 정책체제(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 모순에서 비롯된 위기이므로, 케인스주의라는 또다른 정책체제로 회귀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세계경제 위기는 현 체제하에서는 지난 세기 30년대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능가하는 야만과 파괴의 과정을 통해 이윤율 상승의 새로운 기초가 마련돼야만 극복할 수 있다. 진보 진영이 이미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로 전화된 케인스주의(“좋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운동과 민주적 참여계획경제 구현에 전력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180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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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번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진단되고 있는 듯하다(이는, 언제나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방식이다).
가장 표층적인 차원에 있는 그 첫 번째가 자본가들, 특히 금융자본가들의 탐욕과 정부의 무능(미국의 경우 부시정권의 무능을 말하는 것이라면, 한국의 경우 이명박 정권의 비상식적 작태들이 여기에 해당하겠다)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자본의 자기관철 방식의 차원에 놓여있는 두 번째 진단은 신자유주의를 문제의 원천으로 강조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구조적 문제가 궁극적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
위기의 원인에 대한 이 세 가지 진단은 서로 다른 세 가지 ‘해법’으로 이어지는데, 물론 이 세 가지가 중첩되어 있는 것이라 그 누구도 이 각각을 따로 분리해서 그 자체로 ‘깔끔한’ 해결책을 말하지야 않겠지만, 위기를 보는 지평의 차이는 위기를 넘어서는 경로를 달리 구성하도록 만든다.
만약 이번 사태를 첫 번째 원인에 의해 유발된 것으로 본다면, 자본가들의 지나친 탐욕을 규제하는 공적 장치를 만들고 잘 집행할 수 있는 정부만 들어선다면(또는, 만약 그런 정부만 있다면) 지금 진행 중인 것과 같은 ‘위기’는 어느 정도(늘, '어느 정도'일 뿐이겠지만, 이것의 지속가능성이 자본주의의 능력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을 터) 해결 가능한 게 된다.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오바마가 승리하면 뭔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가 이런 지평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이번 위기의 주동력은 부시정권에서부터 비롯된 것일 터.
신자유주의에서 문제의 원천을 보는 입장이라면--물론 첫 번째 경우와 말끔하게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만--이번 위기는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고하는 사태이며, 그 처방은 ‘케인스주의’라고 통칭되는 정책으로의 전환이 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인 레이건정부에서부터 이번 위기의 주된 바탕이 마련된 것으로 보게 될 터.
하지만 자본주의 메커니즘 자체의 차원에서 이번 위기를 보는 입장에 서 있다면--물론 두 번째 경우와 말끔하게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만--이번 위기는 이윤율이 하락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시작된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고, 이러한 이윤율의 하락은 현단계 자본주의체제 자체의 ‘필연적’인 결과이니만큼 이번 위기의 진정한 극복은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게 된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모든 저항과 비판, 불만, 분노 등을 반자본주의적 차원으로 급진화시킴과 동시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진행되는 반자본주의운동을 활성화하는 것이 될 터. <한겨레>(2008년 10월 25일)에서 퍼온 정성진의 글이 이런 입장에 서 있으며, 앞서 소개한 윤소영, 월러스틴 등도 큰 틀에서는 이와 비슷한 듯.
그런데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늘 ‘필연적인’ 위기를, 기술의 고도화에서부터 야만적인 전쟁에까지 이르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방도들을 통해 ‘극복’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언제나 더욱 ‘강한’ 자본집단들이 만들어져온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국제유대자본의 음모론' 같은 지독한 환원주의/의도주의도 이런 역사에 압도된 의식의 산물이 아닐까)....... 월러스틴 같은 ‘파국론자’들이 향후 몇 년 혹은 몇 십 년 내에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체제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예언’할 수 있는 건, 지금까지와 같은 방도들로서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은 가능하지 않은 지구 차원의 ‘물리적’ 한계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일 터. 하지만 그러한 '물리적' 한계마저 돌파하는, 그 한계를 무한히 뒤로 밀어내는 자본주의의 자기갱신 능력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는 것은 파국론자들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