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회원 게시판 |
 |
|
 |
|
|
|
|
|
2003년, 개혁당의 내우외환이 시작되다
“2003년 벽두부터 개혁당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건이 김원웅 의원 당대표 호선 문제였다.”
여주에서 법무사로 일하고 있는 전 개혁당원 김이준태씨는 “거의 1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건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불길한 징조였다”고 말한다.
지난 1월 20일, 개혁당 대표로 김원웅 의원이 호선되었다. 유시민씨는 4월 재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대표직을 내놓았고, 김원웅 의원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를 뽑은 것은 평당원들이 아니라 전국집행위원회라는 소수의 ‘지도부’였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개미들의 정치를 표방했지만 개혁당을 이끌어가는 것은 사실상 전국집행위원회였다. 당과 관련한 주요 사안은 모두 전국집행위원회에서 논의되었다. 김원웅 대표 선출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당의 리더를 뽑는 중대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개미들은 그 논의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김원웅 대표의 한나라당 경력 따위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다. 절차적 민주성이 훼손된 게 문제였던 것이다. 원칙에 충실한 당원들의 첫 번째 탈당 러시가 시작된 게 그때였다.”
이 문제는 당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대표 호선발표가 있기 전부터 찬반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갈등이 증폭되기만 했다.
호선이 발표된 다음 날인 1월 21일 당게시판에 올라온 글의 제목은 ‘드디어 시작되는 당원들의 탈당 도미노 현상’이었다.
“가슴 아픈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이미 일부 당원들은 우리 당을 탈퇴하겠다고 하고 있으며 곧 도미노처럼 줄줄 탈퇴선언을 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누가 개혁과 한국 사회변혁의 꿈을 안은 이 젊은 동지들에게 피눈물을 나게 하고 있는가?” (작성자: 김민주)
‘어슴새벽'이라는 아이디의 당원은 대표호선이 발표된 날 올린 글에서 “어떻게 선출직 집행위원이 아닌 사람이 대표가 될 수 있나?”라고 분개했고,
박준명이라는 아이디의 당원은 “차라리 체육관 선거라도 되었으면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겨우 5명의 집행위원이 명망가라면 당원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므로, 문제가 심각하다”라고 비판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한나라당 지도부의 대표 ‘직선’ 선출 소식이 알려지면서 기묘한 대비를 이루기도 했다.
이 문제는 결국 당원들의 ‘사후추인’을 받는 형태로 봉합되었으나 이미 상당수의 당원들이 탈당한 후였다. 하지만 그 일은 당내갈등의 시작일 뿐이었다.
두 달 뒤 4·24 재보궐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개혁당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대사건이 터지게 된다.
유시민의 민주당 연합공천이 준 충격
유시민씨는 당대표직을 내놓은 뒤, 4월 24일 재보궐선거에서 고양 덕양갑 지구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상태였다.
그런데 2월 중순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개혁당 유시민 후보가 민주당과 연합공천으로 출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시민 씨는 3월 10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민주당과의 공조는 결코 없을 것이라 못박았다.
“우리의 목표는 부패한 두 거대 정당의 지역분할 정치구조에 결정적인 균열을 내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공천을 받지 않고도 국회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예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지형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려는 정당개혁, 정치혁명의 핵심이다. 나는 전략전술이 아니라 진정성과 열정으로 정정당당하게 이기고 싶다.”
그런데 그 이전인 3월 6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유시민씨는 “국민경선을 통한 단일 후보론이 공론화되었을 경우 민주당에서 공식적으로 제안을 해온다면 검토해 볼 수 있다”는 입장을 남겨, ‘명분 있는 연합공천’은 고려할 것이라는 뜻을 밝힌 바 있었다.
이 기사를 본 많은 개혁당원들이 ‘있지도 않은 거래’ 때문에 오해를 받고 있다면서 펄쩍 뛰었다. 홍민표라는 아이디의 당원은 3월 6일 당원게시판에 “이는 우리 당의 역량을 애초부터 무시하는 처사이며 참다운 개혁정당의 길을 가려는 우리 당원 모두에게 모욕”이라는 글을 남겼다.
보궐선거 직전까지 많은 당원들이 “보수세력과의 야합 절대불가”를 외치고 나섰지만 결국, “설마설마하던 개혁당-민주당 공조”는 현실로 드러났다.
유시민씨는 후보등록을 사흘 앞둔 시점인 4월 4일 ‘본심’을 당원들에게 털어놓게 된다.
“지난주 민주당과 선거공조 찬반투표에서 나는 찬성표를 던졌다. 지금 개혁당과 민주당의 선거공조에 대해 누가 돌을 던지고 있는가?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공격하고 모욕하고 비방했던 세력이다. 민주당 내 반칙세력, 한나라당, 그리고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선거공조를 비난하는 사설까지 썼다. 이런 세력이 입을 모아 반대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든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소위 ‘보수세력’이 반대하는 일이니까 일정부분 정당성을 가진다는 논리였다.
김이준태씨는 ‘이때 당내 갈등이 극에 달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연합공천 반대를 주도했다. 연합공천이 추진되면 내가 당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당원투표에서 연합공천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6:4로 나왔다. 결국 유시민씨는 민주당과 연합공천을 통해 국회의원이 되었고, 나는 탈당했다.”
유시민 연합공천이 당내에 준 충격파는 어마어마했다.
웹프로그래머인 개혁당원 박진철씨는 이 사건이 개혁당에 결정타였다고 회고한다.
“독자후보로 나간다고 말하다가 결국 유시민씨가 당원들의 뒤통수를 때린 격이었다.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급격히 커졌고, 가장 많은 수의 당원이 그때 혹은 이후 몇 달 사이 탈당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개혁당의 원내진출과 독자생존의 불투명성을 들어 민주당과의 공조를 찬성하는 입장도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정치권의 신당논의가 가시화되자 개혁당의 운명은 오리무중으로 빠져든다.
노무현과 개혁당, 신당의 함수관계
유시민 연합공천은 당내의 첨예한 문제였을 뿐 아니라 개혁당의 미래와 이후 탄생한 통합신당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란 주장도 있다.
개혁당의 전 집행위원이자 2003년 12월 현재 임시 당대표 권한대행을 맡고 있는 오정례씨는 이렇게 말했다.
“유시민씨가 연합공천 후보로 나갔을 때 이미 신당 합류의 조짐이 있었다. 대선이 끝나자 이용철, 문성근씨 등 당내 핵심인자들이 개혁당에서 나갔고, 민주당 신당파가 5월 16일 신당추진모임을 결성하는 등 정치권은 신당 창당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재보궐선거가 끝나자 유시민씨와 강영추씨 등도 범개혁신당추진위원회를 만드는 등 발빠르게 보조를 맞췄다.”
하나의 시험관에 담긴 두 개의 새싹 중 하나가 급격히 성장하면 다른 하나는 양분을 빼앗겨 죽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신당론이 커지면 커질수록 개혁당은 쇠잔해져 갔다. 게다가 새만금, NEIS사태, 이라크 파병, 노동자·농민들의 잇따른 자살과 노정갈등 등을 처리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신당논의에만 골몰하는 개혁당 분위기에 실망해 탈당한 이들도 상당수였다.
예컨대 7월 1일, 당 게시판에 남긴 김민준씨의 ‘열 받아서 탈당합니다’라는 글을 보자.
“이번 철도파업에 대한 개혁당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아무 곳에서도 개혁당의 입장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노무현이 하는 일에 개혁당이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철도노동자로서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던 내 자신이 미워진다. 그럼 열심히 신당이나 만드시길.”
개혁당 내 성폭력사건도 큰 타격이었다.(월간 『말』 2003년 4, 5월호 참조)
전 개혁당원 이아무씨는 “성폭력사건이 여러 번 터져나왔는데도 중앙당의 태도는 참으로 안이했다”고 꼬집으면서 “개혁당의 양성평등 당헌에 호감을 느껴 입당했지만, 개혁당은 여성당원들에게 환멸만을 안겨줬다”고 밝혔다.
신당 논의에 한창 불이 붙을 무렵 개혁당에서 소위 ‘끝장토론’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유시민 의원과 김영대 사무총장 등 지도부는 ‘총선용 신당’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평당원 김표무씨 등은 ‘모델하우스 정당은 필요없다’면서 독자적 개혁당으로 총선에 임하자고 주장했다.
격론을 벌였지만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토론은 끝이 났다. 지도부와 일부 평당원 사이의 골만 확인한 셈이었다.
개혁당 의정부 지구당의 고도환씨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재보궐선거 때까지만 해도 4만 명 정도의 당원을 유지하다가 신당합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유시민씨에게 비판적이거나 개혁당 독자생존을 주장하던 당원들은 다 탈당했다. 그 결과 소위 ‘유빠(유시민의 팬)’로 불리는 당원들이 다수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당원 투표 결과가 항상 지도부의 의중대로 흘러간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 덧글쓰기 | 전체글 18건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