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엉덩이가 들썩 들린 듯 요란한 크리스마스가 지나간다.
과연 제데로 환영이 된 것일까?
세상의 돌잔치는 대개 아이는 잠깐 얼굴만 비치고 뒷자리에서 종일 버림받는 날이되기 십상이다.
주인공하고 상관없이 떠들고 마시고 돈주고 받고...
고단한 아이는 울어대거나 배고프다고 했다가 귀찮은 존재가 되기도한다.
예수님은 만족하셨을까?
이 세상에 오신 본래의 생각에 맞는 환영을 받으신걸까?
상관없이 맞이하는 사람들의 기분대로 하고 싶은데로 해대는 환영식은 반갑지 않을수도 있는데,
배고픈 사람에게 환영 받는 사람은 두가지가 있다.
배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해서 먹을 것만 적당히 주는 사람과
배고픈 괴로움과 서러움을 안타까이 여겨서 같이 나누는 사람.
먹을 것을 주는 길은 때론 할수도 못할수도 있다.
늘 줄 수 있는 여유가 안될 수도 있고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곁에 가서 같이 배고픈 사람이 되어 먹을것을 찾는 사람은 언제나 될 수 있다.
그래서 작은 빵조각이라도 하나 생기면 같이 나누어 먹을 때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다.
배터지도록 먹지는 못할지라도!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친구는 비올때 우산을 씌어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아 주는 사람이라고..
맞는 말이다. 우산은 늘 있지 못하기도 하고 둘 이상만 되면 할수도 없기 때문이다.
같이 비를 맞아주는 방법은 너무 쉽고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고 마음을 나누는 길이기도하다.
예수는 우리에게 우리가 흔히 구하기 쉬운 재물과 권력과 건강 장수 등을 주러오지 않았다.
오병이어로 배고픔도 채우고 병을 고쳐 고통에서 건지고 죽은 나사로도 살려 아픔을 덜어주셨지만
그 모든 것은 그가 생활로 육신으로 같이 길을 가는 중에 나누는 행동으로 나온 것들이었다.
이 세상에 온 최종 목적도 그 일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단지 아파하기 때문에 덜어주고 함게 살아가기 위해 한 기적일 뿐이다.
그것 때문에 이 땅에 오셨다면 결코 하늘로 돌아가서도 안되고 중동에서 끝내서도 안된다.
영원토록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든 이에게 부와 권력과 장수를 주고 다녀야 할 일이다.
이쯤되면 코미디가 되고만다.
그런데 정말 예수에게, 또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 코미디를 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한국에서 크다는 교회들이 그러고 그들이 밀어서 대통령이 된 장로 또한 그렇다.
온통 더 잘먹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아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른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애당초 그걸 주려고 했던
사람조차 무시하고 성가신 걸림돌이 된다면 치워버리면서 오직 앞으로 간다.
빵을 더 많이 주기 위해 더 많은 빵을 구해야 하는데 걸리적거린다고 사람을 치워버린다니...
예수를 따르는 교회조차 더 많이 가진 것이 믿음의 기준이고 증거가 된다.
병이 안나으면 기도의 부족이고 믿음이 없어서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집단이 밀어주는 대통령을 안따르면 지옥 갈 사람들이고 빨갱이고...
성탄절에 돌아보는 예수와는 도저히 연결이 안되는 짓거리들이다.
그는 배고픈 이들에게 같이 배고픈 사람으로 머물렀고
아이들에겐 아이들의 눈높이로 그들을 천국의 주인이라고 보호했다.
세리와 천한자, 창녀에게조차 마음으로 다가가 함께 밥을 먹고 집을 방문하고 손을 잡아주었다.
멀리서 불결한 존재들이라고 빵만 툭 집어던지지 않고!
최근 사랑의교회가 2100억을 들여서 새 성전을 짓는다는 뉴스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정말 꼭 그래야하는냐고...
토론회로 열린 자리에서 심하게 일방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무엇을 해야 하는냐는 그 교회 청년부에 있다는 질문자에게
내부에서 항의하고 고치려고 해보고 안되면 얼른 나오라고 했다.
희망도 예수도 없는 교회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사랑의교회는 억울할지도 모른다 .
숱하게 많은 교회들이 땅사고 건물 짓고 같은 사고방식으로 교회를 키워가는데 왜 자기만 욕하냐고,
답변은 그랬다. 적어도 사랑의교회는 그동안 다른 교회들이 먹는 욕을 먹지 않고
대신 목사직 세습도 않고 제자훈련의 모델이 되면서 살아있는 교회로 칭찬받지않았는가.
그런데 변절하는 꼴이 되었으니 한꺼번에, 더 많은 욕을 먹을수도 있다는 내용으로!
그렇다.
예수의 눈높이를 닮아서 세상에 존재하고 살아가지 않는 교회는 욕을 먹어야한다.
예수 당시 기존 유대교 높은 자리 앉은 사람들이 고고하게 서민들 약자를 죄인으로 낙인찍고
더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들며 그것을 밟고 더 올라가다가 하늘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시저가 원로원에서 여러개의 칼에 찔렸지만
유난히 부루터스에게만은 비명을 질렀다.
'부루터스 너마저냐!'라고...
그렇다 원래 배신감은 믿었던 사람에게 당할때 더 큰 법이고
경계하는 대상에게는 치명적으로 허점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랑의교회는 그런 점에서 비명을 들을만하다.
'사랑의교회 너마저냐!'
노무현대통령이 힘들게 모욕을 당하고 있을 때 소속당이었던 사람들은 짐짓 딴짓하고 있었다.
나는 상관 없다는 듯...
예전에는 더 심하기도 했다.
우린 노무현과 상관없다. 차별화해야한다! 고 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림살이가 바쁘다는 이유로 등한시 할 수 있었고,
그러나 냉정히 따지면 모두가 '... 너마저냐?'소리를 들어도 싸다.
그래서 장례길에 '지못미'로 줄을 섰던게 아닌가?
예수가 잡혀가서 고문과 조롱을 당하고 사형길로 끌려가서 십자가에 죽어갈 때
제자들과 예전에 따라다니던 무리들은 모두 숨었고 부인하기까지 했다.
'모른다'고, 아니면 나와 상관없다 십자가에 달아라는 함성속에 묻혀서 구경꾼처럼...
그러나 그랬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나중에 모두 돌아와서 순교를 감수하면서 예수를 증거했다.
지하 카타콤 미로속에서 도망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서로 떡을 나누면서.
그래서 2천년 지난 지금 전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생명으로 그 길을 따르게되었다.
오늘 우리가 다시 모든 이들의 친구가 되고 배신자의 행동에서 돌아올 방법이 거기 있다.
낮은 자리와 고통받는 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비를 맞고 있는 이들과 같이 비를 맞으며 배고픈 자의 곁에서 함께 배고파하며 먹을 것을 구해 나누어먹으며
도망가고 비난하던 자리에서 들었던 '...너마저냐!' 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돌아온 제자들처럼
어쩌면 우리 고달프고 외로운 삶을 버티는 모든 이들의 살아갈 방법이 아닌지도 모른다.
종교와 정치만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도 거만하고 높은 자리에서 가소롭다는 듯 온갖 상처를 만들어내는 집단들, 우두머리, 나의 속성들...
비겁하고 게으른 이유를 포장하고 변명하며 배신을 밥먹듯 동료 친구 가족들을 배신하는 우리들
예수가 이 땅에 온 이날 돌아서보자
예수의 눈높이 사랑을 닮아서 '부루투스 너마저냐!' 에서 돌아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