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자식을 키우는 가난한 엄마들이 일자리 없이 복지정책에 의존하는 상태로 남아 있을 때 중상류 계층의 사람들은 그들을 혐오하거나 불만족스럽게 보는 경향이 있다. 복지정책에 의존하는 가난한 자들은 불운한 상황을 자꾸 만들어내는 집요함과 게으름에 대해 호되게 비난받고 약물 복용자일 것이라고 의심받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의존성'에 대해 비난받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직업을 통한 '자기 충족감'을 추구하기보다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것에 만족해한다. 그들은 정신을 차려 알람 시계를 맞추고, 때맞춰 일어나 일하러 나가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지원'을 대부분 축소하고 있는 지금,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가난한 자들이 월마트나 웬디스에서 고생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비난과 겸손은 이제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견해가 타당할까?
신중하게 죄의식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것이 우리가 느껴야 할 감정이 아닌가? 그러나 죄의식은 필요한 만큼 더 이상 발전하지 못 한다. 적절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이 경우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 하는 다른 사람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다. 누군가 생활비에도 모자라는 임금을 받으며 일한다면-예를 들어 그 사람이 굶음으로써 우리가 더 저렴하고 편안하게 먹을 수 있다면-그 사람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사람의 능력과 건강, 그리고 인생의 일부를 우리에게 선물로 내주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만족스럽게 부르는 '일하는 빈민'은 사실 우리 사회의 주요한 자선가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자녀가 보살핌을 받도록 자신들의 아이를 소홀히 하며, 다른 사람들이 환하고 완벽한 집에서 살 수 있도록 자신들은 허름한 집에서 살며, 인플레이션은 낮아지고 주가는 오르도록 자신들은 결핍 상태를 견딘다. 일하는 빈민의 일원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익명의 기증자가 되는 것이며 이름없는 후원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식당에서 일할 때 동료였던 게일이 말했던 대로 '주고 또 주는' 것이다."
-바바라 에렌라이히. <빈곤의 경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