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식이란 상대와 내가 특별한 단서조항이 없어도 서로 공유하는 도덕성 위에 자리하는 소통의 언어다. 일방적인 주입이 아닌 말 그대로 서로 공유하고 협의할 수 있는 공통된 의견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상식의 세상에 살고 있는가?
큰집에 살고 계시는 어르신께서 “4대강 사업은 생태계를 살리고 13억 톤의 물 자원을 확보하는 생명, 생태계, 수자원 복원 사업이며 이는 내 소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연하기를 종교계나 환경단체가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것은 선거철에 늘 반복되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덧붙였다고 하는데, 과연 4대강의 자연 생태적 습지와 둑을 모두 걷어내고 시멘트로 쌓고 바르면 죽어가던 생태계가 회복되고 수질이 개선된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 기초한 것일까.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물이 고이면 반드시 썩는다”는 말은 옛날 어르신들이 그저 심심해서 지어낸 거짓말이라는 것인가. 자연은 스스로를 되돌리는 능력이 있다. 사람이 화학물질 몇 방울로 만들어내는 정화시스템과는 비교도 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치유능력을 발휘한다. 강변에 서있는 갈대 한포기가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이 거기에 서있는 것이 아니며, 수 만년을 거쳐 만들어진 모래톱은 그저 심심해서 쌓여있는 모래더미가 아니다. 나름의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자 존재하는 것이 자연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흘러가는 길이 늘 평온하고 평탄하지 않음 또한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높이는 살아 숨 쉬는 기능이다. 물에 깃들어 사는 수많은 생명을 온전하게 살리기 위해서 가는 길에 폭포가 되고 자갈밭 여울목도 만들어내면서 흘러간다. 부딪치고 떨어지고 그 고된 여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물은 그 속에 생명을 담고 키워낸다. 부딪치고 깨어지는 과정 속에 용존산소량이 늘어난다. 그것이 생명이다.
강이란 많은 물이 흘러만 가는 곳이 아니다. 아무런 역할도 없이 바다를 향해 흘러만 가는 곳이라면 강이 아니라 수로다. 논에 물을 보내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수로는 곧고 평탄하다. 거침없이 흘러서 논으로 들어가면 그만이다. 수로의 기능은 그것으로 족하다. 장마철이 되면 수로의 입구는 널빤지로 가로막아 더 이상의 흐름을 용납하지 않는다. 간혹 농수로로 들어와 헤엄치던 미꾸라지나 피라미 따위의 생명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로란 논이란 공간에 물을 대기 위한 최소한의 기능만을 부여한 인공적인 물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동강, 영산강, 금강, 한강이 단지 물을 바다로 흘려보내기 위한 인공적인 수로인가 하는 문제다.
타산지석이란 이해타산을 따지라는 타산이 아니다.
수 십 개의 보를 막고 물을 가두었다고 해서 그것이 수자원의 확보라 말할 수 있나. 가두어 둔 물이 스스로를 정화해서 일급수의 식수로 환골탈퇴 한다는 저들의 믿음을 어리석다 할 것인가? 아니면 그 흔들림 없는 믿음에 굳건한 추진력과 옆을 돌아보지 않는 뚝심에 ‘용기 있다’ 칭찬을 해야 하나 헛갈릴 때가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고대 이래 지금에 이르기 까지 위정자의 덕목 중 으뜸이 ‘치수’다. 물을 다스려 백성의 삶을 평화롭고 윤택하게 하는 것 보다 더한 임금의 덕목은 없다. 반복되어지는 하천의 범람으로 얼마나 많은 목숨이 스러져 갔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유랑의 고된 삶을 살았을까? 멀리서 찾을 일도 아니다. 해마다 물난리로 농작물이 망가지고 집안이 침수되어 고통을 겪는다. 반복되는 물난리를 생각하면 4대강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하천을 정비하고 보강해야 함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의 4대강사업의 방법은 아니다. 누구나 다 알듯이 지금의 사업방법은 생태를 복원하고 물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하천주변에 기대어 살아가는 농부의 삶 또한 무너질 것이 뻔하다. 4대강의 본보기 사업으로 삼는 경인운하의 경우 물길을 확보하기 위해 파들어 간 하천의 수위로 인해 주변의 농토는 이미 사막화가 진행된다고 한다. 굴포천 주변의 시골마을에는 이미 우물이 마르고 밭이 말라 관계농업이 아니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도 도통 관심이 없다. 타산지석을 삼을 만한 충분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아라뱃길’이란 환상에 사로잡혀 그 하천주변에서 대를 이어 살아오는 힘없는 사람들의 외침에는 귀를 닫았다. 하긴 광화문의 그 많은 군중의 외침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부류인데 무엇을 기대할까.
“선진국 어디에도 우리처럼 후진적인 노조의 파업은 없다”라든가, 아니면 “선진국 어디에도 우리처럼 후진적인 폭력시위는 없다”라든가에서 들어나는 선진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넘어선 사대주의 시각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이 그렇게도 존경하고 사랑해마지 않는 선진국들은 이미 수 십 년 전에 운하도 파고, 강도 시멘트 둑으로 둘러쌓고, 해안가의 모래언덕위에 제방을 쌓고 바다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고 난리법석을 떨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건설비용의 열배 혹은 수 십 배의 천문학적인 복원비용을 들이면서 천년만년 길이 보전 할 듯 건설한 모든 옹벽을 걷어내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 좋아하는 미국도 그렇고 독일도 그렇고 더더욱 좋아하는 ‘일본’도 그렇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꼭 찍어 먹어봐야만 아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 많은 나라에서 환경복원을 21세기 최대의 화두로 삼고 있는 오늘, 우리는 거꾸로 달려가고 있으니 현실이 참으로 암담하고 답답할 뿐이다.
다르다와 좌파는 동의어다
요즘 지면을 통해 방송을 통해 가장 많이 접하는 말이 ‘좌파’가 아닐까 싶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모두가 좌파다. 거기에는 어떤 근거도 이유도 없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최고의 잣대요, 원칙이다. 그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좌와 우만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남도 있고 북도 있고 하늘도 있고 땅도 있다. 발을 딛고선 나의 시선에서 바라보이는 모든 방향에는 나름의 방향성이 있고 의미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버린 사람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좌와 우다. 나와 생각함이 다르면 모두가 불손한 사상을 가진 위험한 사람이다. 위험요소는 제거를 해야만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가 있다. 같이 공존하는 공동체적 구성원에서 이미 빼버린 아웃사이더다. 생각해보자. 나는 한나라당과 같은 사고를 원치 않는 사람이다. 현 정권의 모든 경제정책이나 국토개발정책과 대북정책에 이르기 까지 그들과 같은 맥박수로 호흡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 나는 좌파인가? 그래, 정치적인 성향은 좌파라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반사회적인 위험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경리되어지고, 배척되어 마침내 제거되어야 하는 그런 적인가. 결코 나는 그런 사람이 못된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에 불과한 사람이다. 다만 그들과 같은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뿐. 더 이상의 차별성은 없다.
편 가르기에 열심인 그들은 이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종교까지 버르장머리를 고치려든다. 하긴 누구는 재임시절에 자기 내키는 대로 이 서울까지 하나님께 봉헌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서울을 봉헌해야 하는데 배척하고 꺾어버려야 마땅한 불교가 서울 한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리 없다. 아니 할 수 만 있다면 개신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를 싹 쓸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적어도 나는 종교의 자유를 누구보다도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개신교에 대해서도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그 알량한 권력을 가졌다 해서 내가 믿지 않는 타종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부류의 그 치졸하고 더러운 짓거리를 질타함에 지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공화국이다. 적어도 법전에는 그렇다. 현실에서는 다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력에 의해 좌절되어진 단어이기는 하다만. 나는 그들의 편 가르기에 의하면 좌파다. 그럼 좌파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위험하고 나쁜 것인가. 우파는 모든 면에서 정당하고 선하며 아름답고, 좌파는 그와 반대로 모든 면에서 정당치 못하고 악하며 추한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좌는 이렇다. 한쪽으로 편중된 모든 것.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기득권층에 편중된 그 힘과 역량을 힘없고 소외된 일반 소시민에게 나누려는 세력이 좌파라고 본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랬듯이 없으면 없는대로 운명이라 받아들이며 저항도 항거도 없이 살아야만 착한 그들의 국민인가. 태어날 때부터 물려받은, 선택한 것이 아닌 선택되어진 그 삶의 굴레를 운명이다. 가진자는 가진 것이 운명이요, 없는자는 없는 것이 운명이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그들이 생각하는 착하고 선하고 아름다우며 정당한 ‘우파’라면 그래서 이 세상은 우파들만이 활개치는 그런 세상이라면 나는 차라리 위험하고 반사회적인 그러나 편중된 세상의 많은 그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좌파이고 싶다. 위험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내가 누구에게 위험한가. 나를 아는 주위의 사람들은 나를 위험한 반사회적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내게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모든 물은 청계천으로 통한다.
큰집에 사는 어르신의 기고만장함은 청계천에 그 근원이 있다. 청계천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못해 강박관념이라 할만하다하겠다. 오늘의 그를 만든 것도 청계천이요, 대운하를 구상하게 만든 것도 청계천이다.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청계천은 생활오수가 넘실대던 버려진 하천이다. 해충이 우글거리고 냄새가 고약한 하천을 시민들의 눈에서 사라지게 하는 마술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청계천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어르신이 빛 속으로 불러냈다. 많은 반대가 있었다. 각계각층이 반대를 했다고 한다. 상인들도 반대하고, 학계에서도 반대를 하고, 시민단체에서도 반대를 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계천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뭔가 대단한 것을 만들고 이루어냈다고 말하는 것은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다. 물론 일부 상인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위협받으니 당연할지 모른다. 그들의 반대는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면 해결되는 일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머지 학계나 시민단체가 주장하던 반대는 무조건적인 반대가 아니었다. 푸른물이 흐르는 하천이 생긴다고 하는데 누가 그 취지를 무턱대고 반대를 했을까. 사람은 물과 떨어져서 살수 없는 동물이다. 다만 청계천이 어디인가. 조선의 수도 한양을 가로지르는 하천이다. 500년의 세월동안 숱하게 쌓인 역사와 문화의 현장이다. 청계천에 산재한 문화재의 처리방법 즉 복원방법에 대한 학계의 반대가 있었다. 덮개를 걷어내고 청계천을 복원함에 있어 산재된 많은 문화재를 제대로 복원해서 진정 역사와 환경이 되살아나는 청계천이길 원했지만 결국 청계천은 절름발이로 되살아났다. 그저 한강에서 끌어올린 수돗물이 흐를 뿐이다. 거기에 역사도 없다. 환경도 없다. 다만 있다면 절름발이 역사가 있고 절름발이 환경이 있을 뿐이다. 청계천을 여름날 가보시라. 그러면 단밖에 안다.
“손과 발을 담그지 마시오. 피부병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그 입이 닳도록 자랑하는 청계천에 발을 담그면 피부병이 생긴단다. 손이라도 씻을라치면 과산화수소수를 한 병 사들고서 씻어야 할 판이다. 현실이 이렇다. 꼴랑 물이 흐른다고 해서 저리도 자랑질에 밤 새는 줄 모를 그런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썩어가는 물을 위해 유지보수 및 운영비가 일 년에 수십억에 이른단다. 현실이 그렇지만 잘 포장되어진 청계천은 지금의 어르신을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일 년 이면 몇 번씩이나 추종자를 대동하고 청계천에 납시어서 정국구상 등을 한다고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이 있다. 청계천의 여러 다리들의 기단석이나 석축 등 많은 유물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혹 알고 있는지. 학계에서 그토록 복원을 원하던 그 많은 석물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청계천이 끝나는 지점에 가면 중랑천과 합류하는 지점에 이름도 거룩한 ‘중랑물재생센터’가 있다. 말 그대로 서울시내의 하수와 오수를 재생하는 중랑하수처리장이 그 유물들의 종착역이다. 오물을 뒤집어쓰고도 견뎌내던 그 생명력이 드디어 하수처리장의 빈터에서 비나 바람, 그리고 햇빛을 가리는 가림막도 없이 버려져 죽어간다. 이것이 현실이다. 어르신이 입이 닳도록 자랑하는 청계천의 또 다른 이름은 ‘중랑하수처리장’일지도 모른다. 돈이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는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정권이 오늘의 2MB정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입만 열면 청계천정신으로 정국을 돌파하란다. 마음을 바꾸던 끝까지 반대를 하던 그저 내말만 열심히 주절거리고 거리낌 없이 진행을 하란다. 그것이 청계천에서 태어난 위대한 용의 일갈이다.
로마사람들이 우리의 현실을 알았다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는 말은 차마 못했으리라. 어디 위대한 ‘청계천’의 물길에 비할 바인가.
세종시도, 4대강도, 대북정책도, 경제정책도 모두가 청계천의 물길에 발을 담그면 일사천리다. 모든 말이 필요 없다. 상대의 목소리는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이다. 그 모든 반대를 잠재우는 방법은 오직 내가 하는 말을 열심히 재생산해서 되뇌라는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주무부처의 담당자를 질책했다고 한다. 위대한 ‘청계천정신’을 구현하지 못하니 쪼인트가 문제인가 단칼에 머리도 날려버릴 기세다.
특별상식도 아닌 일반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면 족하겠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많은 것을 소유하길 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잣대가 저 높은 곳에서도 구현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 다다. 무엇인가를 가졌다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도, 금력을 가진 사람도, 명예를 얻었다는 연예인이나 체육인들도 마찬가지다. 뭔가를 손아귀에 쥐면 어쩌면 그렇게도 천편일률적으로 몸에 탈이 나는지 모르겠다. 비리에 연루되거나 사건에 연루만 되면 그래서 법정에 서야하는 상황이 오면 모두가 병자다. 심장도 아프고, 신장도 아프고, 허파도 아프고.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마음이 아파오고. 축구장에서 야구장에서 아니면 조명이 현란한 무대에서 그토록 펄펄 날던 사람들이 군 입대를 앞두면 모두가 아프단다. 허리고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콩팥도 아프고.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또 마음이 아프고. 아무래도 나라는 사람은 마음에 선천적인 고질병이 있나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사람들만 보면 가슴이 아파올까.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것이 다다. 다르다는 것은 그냥 ‘다르다’라는 말로 소통되는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