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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어느 날의 일기('운명이다'를 마주하며)
사랑시 | 2010-05-13 19:46:17 | 조회 753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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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5.6.

 

밤늦게 퇴근해보니 엊그제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책들이 도착하여 포장 박스에서 벗어나 내 방 화장대 위에 놓여져 있었다. 호기심과 부지런함이 가미된 아이들의 재빠른 행동으로 이미 책들은 각각의 주인을 찾아와 있는 것이다. 두고 두고 인격 수양을 위해, 그리고 언제 절판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법정 스님의 책들을 많이도 사날랐는데 이번에도 관련된 책이 두 권이 끼여 있었고, 내가 평생 손에 들지 안들지 모르는 [경영자 vs 마케터]라는 책도 한 권 끼여 있었다. 나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집엔 이런 책에 관심이 많은 아저씨가 하나 있다. 그리고 마치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맞딱뜨렸을 때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으로 마주하게 된 [운명이다] 양장본과 반양장본.

 

애써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재우려 못본 척 하며 아이들과 함께 TV 드라마를 보았다. 퇴근 후 집에서 쉬더라도 TV를 켜지 않는 요즘엔 아이들 덕분에 드라마를 보게 된다. 예전에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봤던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도 그랬고, 이번엔 '신데렐라 언니'이다. 한참 사춘기에 접어둔 열서넛 여자애들한테는 이 드라마가 지들 수준에 맞는가보다. 실제로 드라마 시작 부분에 '15세 이상 관람가'라든가 하는 제한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자애들은 젊은 선남선녀의 사랑이 포함된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 너무나 여유 없고 정신 없이 드라이하게  살아서 별로 울 일도 없는 요즘, 이 드라마가 메마른 감정을 자극하며 눈물을 쏟아내길래 애들 앞이라는 체면도 버리고 드라마에 몰입한 채로 한껏 감정이입을 해보기도 한다. 그 누구보다도 국민 여동생이라는 문근영의 은조한테 감정 이입이 잘 된다. 나로서는 문근영의 연기에 빠져서 드라마를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와 함께 눈물을 흠뻑 흘리고 나면 어딘가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도 같고 하여튼 맹숭맹숭하게 볼 때 보다는 눈물이라도 흘리며 보는 것이 내겐 아까운 시간 낭비했다는 기분이 안들게 한다.

 

드라마는 끝났고 애들을 재우기 위해 TV를 껐다.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와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두 권. 어떻게 이 책을 펼치고 읽어 나가야 할 지 막막했다. 낮 1시 반 쯤 점심을 먹은 후로 먹은 음식이 없다면 밤 11시가 넘은 시간엔 허기를 지나 별 감각이 없어져서 보통 때는 우유나 물 한 잔 마시고 그냥 잠을 청하게 되지만 나는 이미 봐버렸다, 냉장고 안에 막걸리 한 병이 들어있음을. 누가 갖다뒀는지도 모르지만 어제 내 눈에 발견이 되었던 사실은 난 기억해 내고야 말았다.

 

햐, 10여년간 알콜 한방울 입에 담지 않았던 내가 막걸리 맛을 보게 된 것이 언제 적이었더라? 2006년인가 2007년인가? 그 사이에 제법 막걸리니 동동주니 즐길 줄을 알게 되었다. 소주는 아직도 입에 담지 못하지만 왠지 막걸리와 동동주는 내 체질에 맞는 것 같아 내 스스로 몸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750ml 딱 한 병, 거기까지가 기분 좋다. 약간은 헬렐레 하여 마구 수다스러워지고 톤이 높아지고 웃음이 헤퍼지는 지점이다.

 

[운명이다] 양장본은 속지에 2010.5.6. 이라는 날짜만 쓰곤 그대로 케이스에 넣어 책꽂이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리곤 막걸리와 함께 [운명이다] 반양장본을 마주했다. 물컵에 따라놓은 물로 입안을 먼저 적신 후 또 다른 컵에 막걸리를 수북히 따라 올린다. 만감이 교차하며...... 잠깐 후루룩~ 펼쳤을 때 나타났던 사진 중 막걸리가 나왔던 장면이 일부러 기억해내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따라와 내 앞에서 멈춰버렸다. 잠시 울컥했다가 고개를 내젓곤 책 표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개나리와 같은 밝은 노랑색이 눈앞에 빛을 띠듯 확 펼쳐지며 눈을 부시게 했다. 무슨 말을 적어야 하나? 아직 없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형식처럼 2010.5.6. 이라고 한귀퉁이에 날려 적는다. 그렇게 특별한 '상징'을 지닌 노랑 속지를 두 장 넘기고 나서는 별 망설임 없이 책장을 연달아 두 장 넘겼다.

 

'고맙습니다'라는 글이 흘러나왔다. 그냥 읽어나가도 될 걸 굳이 뒤로 넘겨 누구의 글인가 확인을 했다. '노무현재단 상임이사 문재인'라고 씌여 있었다. 다시 앞으로 돌려 글을 읽기 시작했다. 글을 읽다 보니 이건 100% 문재인님의 글이 아니고 첨맘님의 글이 뒤섞인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두 분의 감회나 생각, 노대통령님에 대한 느낌이 같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해내는 언어는 달라질 수 있는데 내겐 익숙한 표현들이 많았다. 문재인님의 글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첨맘님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그러나 그게 뭔 대수랴? 누구의 표현이든 노대통령님을 가슴에 묻은 이의 마음은 다 같은 것을.

 

마지막 부분이 참 애틋하면서도 따뜻하게 다가왔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국민 여러분께 바칩니다. 국민장 기간 동안 봉하마을과 전국의 분향소를 찾아와 애도해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동병상련의 정을 담아 이 책을 드립니다. 분향소에 오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명복을 빌어 주셨던 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립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아주 많이 사랑하셨던 분들에게는 이 책이 따뜻하고 정겨운 작별 인사가 되기 바랍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마지막 길을 걸어야 했던 그 외로웠던 발걸음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적셨던 모든 이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잘 몰랐거나 아직도 오해하고 계신 분들에게는 이 책이 막혀 있던 소통과 공감의 문을 여는 손잡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멋있는 표현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유가족과 옛 참모들, 동지들, 오랜 벗들, 노무현재단 임직원과 회원들 모두를 대표하여, 아직도 애도를 끝마치지 못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첨맘님의 글, '노무현 자서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에는 매우 상세하게 그간의 정리 과정, 자료들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노대통령님이 생전에 꽤 많은 구술 기록 및 집필, 자필 메모 등을 남기신 것을 알 수 있었다. 첨맘님도 그렇지만 노대통령님 역시 글을 통해 스스로 성찰을 많이 하신 분이란 걸 알 수 있다.

 

책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읽다 보니 첨맘님이 그 많은 자료들을 보면서 때때로 겪었을 감정의 굴곡들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듯 생생하게 보이는 듯 했다.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들을 하셨던 것이 더 구체적으로 맘에 와 닿았다.

 

<영매가 되어 보낸 지난 6개월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대통령님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셨겠지, 이런 상황이었겠지, 하고 내적대화를 나누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몰아치면 잠시 글을 멈추곤 했습니다. 저와 생각이 똑같지는 않았던 대목, 제가 미처 몰랐던 부분들, 돌아보니 그때 그 말씀이 이런 뜻이었구나, 다시 돌아보게 되는 장면들. >

 

<원고를 최종 마무리하던 마지막 보름, 마지막 1주일. 대통령님이 그 순간 어떤 마음이셨을까가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영매 노릇하기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마지막 원고마무리 때 만났던 이창동 감독이나 문성근 선배 등이 “빨리 그 원고를 털어야지 그러다간 어디 치료받으러 갈 일 생기겠다”고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원고를 마무리하는 과정도 슬펐지만, 이 원고를 끝내면 이제 대통령님과 정말 이별이겠구나, 영매 노릇이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더 슬펐죠. 뭐라고나 할까요, 어쨌거나 글 쓰면서는 늘 대통령님을 만나는 기분이었으니 따뜻하고 다정한 슬픔과 분노와 좌절감이 동시에 들었다고나 할까요.>

 

'유시민, 참 복받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책장을 넘겼다. 목차가 나오고 이어서 노란 바탕에 <프롤로그/실패와 좌절의 회고록>이 나오는데 이걸 넘기면 애써 담담했더 마음도 요동을 칠 사진이 나온다. 노 대통령님이 손녀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웃음짓는 모습, 손녀는 누굴 보고 손을 흔드는지 오른손을 높이 들고 웃고 있다. 얼른 책장을 넘겨 버렸다. '봉하마을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손나발을 만들어 나오라고 소리쳤다.'로 시작되는 글. 난 결국 한 단락을 읽고 막걸리를 한 컵 남긴 상태에서 책을 덮어 버렸다.

 

난 소위 '노빠'도 아니었었다. '노빠 아닌 유빠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감이 생기기도 했었다. "왜 그래야 하지? 난 노짱님을 알기 전에 유시민을 알았고 유시민이 좋을 뿐인데? 유시민을 알았을 때 노짱님은 이미 대통령이었기에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이러던 내가 언젠가부터 노짱님 사진만 보면 눈시울을 붉히게 되었다. 이젠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작년, 수원역 분향소에 밤늦게 몰래 가서 백화점 옆 계단에 앉아 동영상 보며 끊임없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동영상 배경음악으로 여러 곡이 있었지만 유독 더 슬프게 가슴 속을 파고들었던 노래는 이 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였었다. 지금도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오면 겨우 아문 상처가 덧나듯 가슴이 아려오곤 한다. 그러면 일부러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름으로써 눈물샘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

 

책 서두를 보면서 첨맘님이 복도 많고 행복하구나 생각한 것은 일부러 의식해서 만들어낸 생각이 아니었다. 그냥 저절로,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이었다. '이 자서전은 "인간 노무현이 자신의 삶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라고 첨맘님은 썼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님의 삶 전체를 들여다보고 그 님의 삶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을 기록하는 것을 당신 손으로 직접 하셨으니 이 또한 당신의 삶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겠는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첨맘님의 자서전은 커녕 평전 한 권도 쓰지 못할 터이니 당연히 부러운 맘도 들면서, 첨맘님의 재주와 복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 이 느낌에 대해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여 컴퓨터를 켜고 글을 쓰다 보니 알딸딸하던 취기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 역시 앞으로 책을 읽으며 첨맘님이 겪었을 감정의 굴곡을 지나가겠지만, 오늘밤은 분노의 마음보다 따스한 마음을 품고 잠들어야겠다. 상처 받은 모든 영혼이 평안하기를 꿈꾸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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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소망  

전 오늘 뒤늦게 책 주문 했는데 떨려서 끝까지 읽을수나 있을련지 모르겠네요. 독서평 보니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네요. 감사합니다
10-05-13

알아갈수록  

그냥 이 글을 보며 여러 가지 공통점을 느껴서 댓글을 답니다. 전 골수 노빠이면서 지금 슬슬 유빠로 물드는 중입니다만, '노빠 아닌 유빠가 있을까?' 하는 건 저의 오랜 궁금증이었거든요. 또 위에 인용하신 문재인님의 글은 저 역시 참 아름답고 멋진 문장이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이트에 소개한 적이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운명이다'를 쓴 첨맘님이 참 복 받은 사람이라는 것, 이 생각에도 동의합니다. 님이 쓰신 이유와 더불어 자신의 정치적 롤모델의 성공과 실패를 복기했으니 앞으로 여러 선택을 하는 데 있어 노짱님이 겪으셨던 것보다는 덜 힘드시지 않을까 하는 이유에서입니다.
10-05-13

박무  

책을 70여권 샀습니다.
근데 정작 저는 아직 들여다 보질 못하고 있습니다.
글을 접할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지 않는군요. ㅡ.ㅡ;;
10-05-14

나싱  

사랑시님 나빠요!
아침부터 머슴아 눈에 액체가 고이게 만들었으니...
1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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