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글은 산벗 산행후기에서 함께 입력된 아사달의 봄님의 글입니다. |









시리도록 푸른 하늘 밑, 계룡산은 거기에 있다
1월 하늘은 높고도 푸르렀다. 쏟아지는 햇살은 눈이 부셨고, 바람은 차가웠으며,
산마루에 가득한 하얀 눈이 또한 눈부셨다. 세상을 달관한 백발노인의 초연함이랄까 세상을 굽어보는 계룡산의 품은 넉넉했고, 그 품을 파고드는 여행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고도 따스했다. 동학사 입구 너른 마당에는 정갈하게 주차장이 자리하고 찾는 객을 맞이한다. 산이 넉넉하니 주차장도 넉넉하다. 그 옛날 이쯤에는 당간지주가 높고도 위용 있게 자리하고 깃발을 펄럭였겠지만 세월의 무상함은 이기지 못해 그 자취가 없다. 당간지주야 오간데 없다 해도 예서부터는 세상시름 덧없는 ‘부처의 세상이요, 이상의 세계다’ 스치는 바람결에 묻어오고, 그 울림에 놀라 올려다본 계룡산은 그렇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더없이 시원하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은 울부짖음이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길이다. 새벽을 깨우고 어둠이 채 거치지지 않은 거리를 조바심으로 달려 달려온 길이다. 무엇을 만나고자 그 이른 시간을 부산스럽게 깨웠을까. 바람마저 차가운 그 새벽길을.
종종거리고 부산떨며 늦으면 어떡하지 하는 조바심으로 달려온 동학사 가는 길에는 늙은 벚나무가 두 줄로 길게 늘어서서 시위하듯 우리를 맞이한다. 바람이 차면 나뭇잎들 미련 없이 떨어내고 죽은 듯이 말이 없다지만 그 품속에 뜨거운 희망 오롯이 담아 내일을 기다린다.
“그래, 불어라! 불고 또 불어라. 앙상한 가지에 서릿발 같은 칼바람으로 불어라. 너의 그 오만함도 시간이 가면 그만이다. 품에 품은 불꽃하나 온전히 지켜내면 이내 봄이다. 아지랑이 아롱아롱 피어나는 봄날이 오거든 그때에 보여주마. 죽은 듯이 엎드려 오늘을 보낸다지만 때가되면 천지간에 봄꽃으로 터져 나오리라. 도도한 강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듯이”
길게 늘어선 늙은 벚나무는 그렇게 말하듯이 당당함으로 북풍한설을 맞고 있었다. 길이 곱고도 당당하다. 다가올 봄이 기다려짐은 그 품에 뜻이 깊어서다.
길이 끝나는 곳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몇몇 사람들. 이내 그들이 전북산악회 ‘묏비나리’ 임을 알았다. 손에 든 깃발이 정겹고도 반갑다. 시민광장을 알리는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 그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바람으로 불어온다. 군산에서, 전주에서, 서울에서, 대전에서 마음과 마음이 모였다. 천지사방에서 모였으니 또한 천지사방으로 불어갈 마음이고 바람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은 그저 몸짓이 아니다. 그 몸짓에는 울부짖음이 있다. 시나브로 밝아올 새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순간 천지개벽하듯 어둠을 걷어낼 울부짖음이 있다. 동학사 당간지주 그 가장 높은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라. 사람 사는 세상이 바로 여기다.
해당화 붉은 꽃잎, 봄이 오면 찔레꽃으로 흐드러져라
아사달에 봄이 오면 녹두꽃도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더 이상 트집을 잡지 않아도 좋을 세상이 오겠지요. 그런 세상에 마음과 마음이 모이면 대한민국의 힘도 더욱 커질 터이고요. 사람마다 함박웃음 지을 때면 여름날엔 화로를 준비하고 겨울날에 부채를 챙긴다 해도 모두가 웃음이겠지요. 그럼 아마도 기나긴 겨울밤 다정도 병인듯 하여 임의 무심함에 허벅지 찌를 아낙네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덕담도 섞어가며 이어지는 인사에 전북도 대전도 서울도 이미 없었지요. 우린 늘 하나였으니, 둘이었던 기억이 없으니 당연히 하나일수밖에.
인사도 나누고 손도 잡았으니 이제는 산행이다. 걷는 걸음 하나, 하나가 경쾌하고 상쾌하다. 잘생긴 적송도 날 반기고 아름드리 신갈나무도 반갑단다. 당단풍의 예쁜 몸매도 정겹거니와 물푸레나무의 억센 팔뚝도 좋고말고. 발아래 밟히는 눈도 좋고, 얼음도 좋다. 그렇게 우리들 가는 길, 서걱서걱 뽀드득 뽀드득 걷는 소리도 요란하고 나누는 정담도 점점 옥타브를 더해가니 동학사 맑은 골은 숨소리로 발소리로 소란스럽다.
세상이 어지럽던 날, 어린누이 손 꼭 잡고 “너만은 살거라, 너만은 살아남아 이 오라비를 기억해주렴.” 비장하고 장엄하게 유언인 듯 비문인 듯 그렇게 마지막 말 남겨놓고, 반역의 세월 속에 이슬로 사라졌을 이름 없는 민초들, 그 슬픈 고혼 어디쯤에 떠돌런지. 산 높고 골이 깊어 수 천 수만 넉넉하게 품어준다 말도 많고 설도 많은 계룡인데 어느 골이던지 행복하고 즐겁기를 빌고 빈다.
아스라한 황산벌도, 멀고멀어 뵈지도 않는 북녘의 압록강변 모래밭도 바람결엔 한달음이라. 뚝뚝 떨어져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해당화 꽃잎으로 그렇게 스러졌을 많은 영혼이여 반역의 역사 모질게도 끊어내면 꽃으로 피어나길, 이름 없는 개천가 무덤같이 흐드러질 찔레꽃 순백의 무덤으로 부활하길, 걷는 걸음마다 소원도 빌어보고......또 아는가. 두 손 꼭 잡고 살아주길 빌고 빌던 그 어린 누이 소원처럼 바람처럼 살아남아, 또 그렇게 몇 해를 더해 복숭아꽃 붉은 꽃잎 두둥실 흘러가는 실개천 언저리에 무뚝뚝하고 멋대가리 없는 선머슴 하나 만나지고 복사꽃 발그레한 수줍은 사랑, 날 저물고 해 저물어 찔레꽃처럼 피어나 어제가 오늘이듯 오늘이 내이이듯 그렇게 살아지면 사람 사는 세상 소리 없이 찾아 들려는지.
바람이 차다지만, 겨울삭풍이 매섭다지만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야 바람도 어쩌지 못해. 얼어붙은 눈밭에 아이젠 각진 칼날 힘차게 꾹꾹 밟아, 민심은 천심이라는데 민심을 거슬러 오만의 칼날 번뜩이는 저들에게 창칼 같은 마음으로 밟고 또 밟아 오른 터엔 오누이탑 정겹구나. 수 백 년은 고사하고 천년도 넘고 넘어 깨어지고 닳아져서 오히려 마음 가는 오누이탑이여. 사람의 인연이란, 사람의 마음이란 그 끝 가눌 길 없어 서방정토 극락왕생 행복하고 즐거운지.
천지사방 새벽을 열어 우리 그대 앞에 섰으니 서방정토 극락왕생 사람 사는 세상에 흥에 겨워 살아 보려는지 청량사 맑은 바람결에 그 뜻 알려주면 좋으련만. 말 없는 그대 그 세월을 믿어볼밖에.
맑고 맑은 저 햇살 속에 삼라만상 모든 것 품고 또 품어 오히려 투명하니, 우리 가는 길에 저와 같은 햇살만 부서져내려 노랑도 초록도 분홍색도 파랑색도 결국 햇살 속에 점점이라.
1월 계룡산에는 햇빛이 찬란해 눈이 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