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리꾀르의 윤리적 국가론
민종기 교수
1. 서론
본 논문은 뽈 리꾀르(Paul Ricoeur)의 국가론을 연구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리꾀르는 훗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해석학에 접목시킨 현존하는 불란서 철학자이다. 그는 또한 종교적으로 프랑스 칼빈주의자의 지적 전통에 입각하여 기독교 사회 윤리사상을 재해석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실천적 프로테스탄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리꾀르는 1955년에 간행된 '역사와 진리(History and Truth)'라는 논문집의 자서전적 서문에서 자신의 역할이 첫째 대학교수, 둘째 철학사 연구원, 셋째 에스프리지(Espirit)의 편집위원, 넷재 기독교 메시지의 청종자 임을 밝히고 있다. 이 중 처음 두 가지 직책, 즉 대학교수와 철학사 연구원의 직책이 주로 지적인 영역에 속한다면, 나머지 두 직책, 즉 에스피리지 편집위원과 기독교 메시지 청종자의 직책은 실천적 영역에 관련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리꾀르는 앞의 두 지적인 성향도 실천적인 것이 될 때 비로소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것과 이들은 사회적 정치적 요구와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실천에 관한 리꾀르의 강한 관심은 에스프리지의 편집 위원, 기독교 메시지의 청종자라는 면에서 크게 부각되는데 특히 에스프리지를 통한 역할 속에서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다. 에스프리지는 1932년 에마뉴엘 무니에(Emmanuel Mounier, 1905-1950)에 의해서 진보적 기독교 월간지로 창간되었다. 무니에는 1930년대를 전후한 시대를 가리켜 문화의 위기가 점증하는 시대로 파악하고 "위기의 인식"과"르네상스 재현"을 의도하였다. 리꾀르는 무니에의 사회개혁 운동에 공감하고 1947년부터 에스프리지의 편집위원이 되었다.
리꾀르는 에스프리지를 통하여 당시의 저명한 기고가인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과 프라스와 모리악(Francois Mauriac) 그리고 젊은 문필가들인 쟝 다니엘루(Jean Danielou) 앙리 마루(Henry Marrow), 쟈끄 엘륄(Jacque Ellul), 드니 드 루즈몽 (Denis de rougemont), 쟝 라끄르와(Jean Lacroix),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등의 기독교적 지성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에스프리지에 철학, 신학, 종교와 정치문제에 대하여 기고하면서 구체적인 사회적 정치적 행동 강령을 기독교적 정신과 종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적 행동을 위한 기관지인 '사회적 기독교(Christianisme social)'등의 잡지에 다수의 논문을 기고하였다. 프랑스령 알제리아 전쟁 중에도 리꾀르는 침묵하는 철학자로 남아 있지 아니하고 그 전쟁의 정당성에 관한 토론에 참가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다. 리꾀르의 실천적 관심은 특히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초기 논문과 저작에서 보여주는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특히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물음은 그의 중심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리꾀르는 국가를 두 측면에서 접근하다. 첫째는 역사의 발전과정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는 "합리성"과 "진보"의 측면이고, 둘째는 이것과 함께 병존해 온 "권력의 강제성" 또는 "폭력"의 측면이다. 리꾀르는 국가가 가지는 이 두 가지 측면 - 합리성과 폭력 - 그 자체가 처음부터 선한 것도 또한 악한 것도 아니라는 것, 문제는 합리성과 폭력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의 의지"라는 것이다. 리꾀르는 국가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때로는 구속적 기능을 때로는 파괴적 기능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국가의 기능을 파괴적 기능과 구속적 기능으로 양분할 때 무정부주의 - 국가의 파괴적 기능 만을 보고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입장 - 와 국가지상주의 - 국가의 구속적 기능 만을 강조하여 국가를 절대적인 우상으로 만들려는 입장 - 는 비판되어야 할 이론이다. 이와 같은 이론은 국가 기능의 일면 만을 지나치게 확대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가지는 두 기능간의 상호 연관성을 인식하여 한편으로는 국가의 구속적 혹은 긍정적 기능을 확대 발전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파괴적 혹은 부정적 기능을 제한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2. 가류성(Fallibility)
리꾀르는 국가론의 기초는 인간의 해석이다. 그리고 인간 해석의 핵심은 인간의 "악"이다. 리꾀르는 악의 문제가 "심리학, 범죄학(criminology)과 형법(criminal law)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의 핵심문제로 취급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악의 문제(the problematic of eviil)가 권력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악의 원인으로서의 인간의 가류성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가류성이라는 개념은 리꾀르 인간론의 중심 축인 동시에 그의 국가론 전반에 걸쳐서 제기되는 기초 개념이다. 리꾀르는 먼저 인간을 "가류적 존재(fallible man)"라고 말한다. 그가 인간을 가류적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인간이 "악을 가능하게 하는 타고 난 고유의 허약성(weakness, fraility)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 같은 인간의 허약성이란 자아의 불균형(disproportion)과 불일치(non-coincidence)로서 인간의 내면적 부조화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쾌락의 즉각적인 충족을 꾀하는 동물적 생활의 추구와 행복을 갈망하고 삶의 조화를 추구하려는 정신적 생활의 추구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로서, 요컨대 쾌락의 원리(the principle of pleasure)와 행복의 원리(the principle of happiness)의 불일치이다. 리꾀르는 이것을 "삶과 사유의 괴리"이며 당위와 존재의 갈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가류성이나 허약성이 바로 인간의 타락성(peccability)을 의미하지 않는다. 리꾀르에 의하면 가류성은 단지 악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근본적 구조로서 이것은 이미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깊이 잠식된 인간의 처지, 즉 타락성과 구별되어 야 한다. 그러므로 가류적 인간(fallible man)은 그 자체로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가류성은 단지 악을 낳는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이며 원초적 한계 상황인 것이다.
오히려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가류성이 아닌 인간의 악(evil)이다. 인간의 악이란 가류성의 경험적 실현이며 그 결과이다. 리꾀르는 인간의 악이 갖는 특성을 몇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악의 실재성(positiveness)이다. 악이란 무(nothingness)도 단순한 결핍(fault)도 또한 무질서(disorder)도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 속에 위치한 실재하는 어두움의 힘(the power of the darkness)이다. 둘째는 악의 외재성(extemality)이다. 악은 인간에게 내재하는 것이 아닌 외적 유혹에 의해 부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악을 범한 인간일지라도 그 자체로 악한 존재(an Evil One)라고 볼 수 없다. 셋째는 악의 자발적 전염성(auto-infectibility)이다. 악은 인간 의지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서 생기며 인간이 자기 자신을 노예 상태나 악의 세력 속에 가두는 것이다. 이는 자유를 사용하여 자기를 구속(the act of binding oneself)하는 것이다.
이때 악을 범하는 인간은 결코 인간의 근본적 구조를 파괴시키거나 파멸시키지 않는다. 단지 제어할 수 없는 자아에 대한 애착으로 말미암아 악에 오염될 뿐이다. 이와 같이 가류성이 악의 조건이고 악은 반대로 인간의 가류성의 결과라면 가류적 인간을 악인으로 전환시키는 매개체는 무엇일까? 리꾀르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의 열정(passion)이다. 열정은 감정이나 이성과는 구별되는 의지 그 자체이다. 특히 선택의 순간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경험 세계 속에 나타나는 의지가 열정이다.
리꾀르는 이러한 열정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열정은 일종의 자기 속박(bondage)이다. 열정에 의해서 정신과 의식은 그 자신을 결박한다. 다시 말하면 그릇된 열정은 경험으로 체득한 필연성, 즉 행위의 당위성을 거부하고, 인간의 자아 속에 분열을 일으키면서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자신의 열정의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여기서 열정은 인간의 원초적 자유를 유린하는 자아분열을 만든다. 둘째, 자신을 속박하는 기능을 가진 열정은 무익한 것(vanity, nothingness)을 추구함으로 악을 만든다. 무익한 것에 대한 상상력은 무익한 것을 계획하여 매력있는 신화로 바꾸고, 그것을 인간의 정신 속에 성취하? 명령한다. 그 결과 상상력을 우회하여 무익한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끝없는 과실의 원천이 된다. 셋째, 열정은 괴로움의 시발이 되는 무한정한 무절제를 낳는다. 계획된 신화 속에 사로 잡힌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는추구 속으로 인도되며, 그 결과 인간은 오히려 조화와 균형있는 삶을 상실하고 무질서 속에 빠진다. 특히 허무한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무한정, 무절제한 추구는 인간에게 파멸과 불행을 가져오는 악을 창출한다.
3. 권력의 악
권력의 악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며 무익한 것을 추구하는 가류적 인간의 열정이 악을 만든다. 이때 생기는 악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집단적이며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도덕적 과실을 구성하고 상호 인간 관계를 매개하는 사회, 문화적 제도를 나타내는 공동체적 악을 구성한다. 인간의 악이 집단적 형태를 가지는 이유는 가류적 열정이 상호 인간 관계가 응고된 실체인 제도 속에 이식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악의 제도화, 악의 개체화라고 표현되는 악의 집단 현상을 구성한다.
그런데 리꾀르는 이러한 집단적 악이 나타나는 인간 관계의 세 주요 영역을 소유의 경제적 영역, 권력의 정치적 영역, 그리고 가치의 문화적 영역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각 영역에서 나타나는 가류적 집단 현상 또는 집단적 죄(collective sin)를 권력의 악, 소유의 악 그리고 가치의 악으로 나눈다. 다음에서 특히 권력의 악에 대하여 상세히 논하기로 한다. 가류적 인간은 세 가지 영역에서 집단적 죄를 드러낸다. 즉 정치적 영역의 권력의 악, 경제적 영역의 소유의 악, 그리고 문화적 영역의 가치의 악이 그것이다. 이들 중에서 최상위의 악은 "권력의 악"(the evil of power)이다. 그러나 권력의 악이 상위의 악이라고 하여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소유의 악, 가치의 악보다 더 부패한 것은 아니다 .단지 권력의 악의 상위성은 권력 그 자체의 본질적 특성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권력의 악을 직접 논하기 앞서 권력의 특성과 권력으로부터 권력의 악으로의 이행과정이 설명되어야 한다. 권력은 상위성을 가진다. 권력은 소유나 문화적 가치,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인간 역사의 추진력이 된다. 권력은 역사의 무대 위에 새로운 국가를 세웠으며 우월한 문명과 지배계급, 나아가 일정한 사회경제체제를 만들었다. 이때 권력은 항상 경제적 구조나 문화적 도구를 재가하는 물리적 강제력을 가지는 최종적 권위가 되었다. 권력의 두 번째 특성은 양의성(ambiguity)이다. 권력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또는 권력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권력은 거대한 인간의 악의 출처가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악을 치료하는 교정기능, 즉 인간의 과도한 열정을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더구나 비폭력적 권력이 도덕적 힘을 가지고 인간성 향상을 위한 교육에 참여할 때 권력은 오히려 구속적 기능을 수행한다. 또 한편 권력은 타락의 가능성으로 넓게 열려진 인간이 악을 낳는 가장 쉬운 기회이다. 여기서 권력의 파괴적 기능이 생겼다. 궁극적으로 권력은 구속적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고 파괴적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는 이중적 성격, 즉 양의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항시 인간은 권력 앞에서 "위대성"과 "유죄성"이라는 두 가지 기능성과 대면한다.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공헌할 수도 있고 인간의 파멸을 위해 공한할 수도 있는 것이 권력의 특징이다.
이제 권력의 죄성에 관한 논의로부터 권력의 악의 원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권력의 악의 근본적 원인은 인간 자신이다. 본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류적 인간의 열정이다. 권력의 주변에는 항상 극단적인 인간의 열정들이 자존심이나 시기심 또는 두려움 등의 형태로 존재하며 이것이 이성의 합리적 목표와 조화된 감정의 기대를 폐기하는 권력의 악을 생산한다. 여기서 리꾀르는 권력이 악의 통로일 뿐 악의 원인 그 자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권력은 인간상호관계를 매개하는 객체인 제도를 형성하므로 중립적 특성을 지닌다. 반면 자존심, 시기심과 두려움 등 인간의 열정은 권력의 악을 구체적 역사 가운데 만들어 내는 악의 근본 원인이다. 권력의 악의 문제는 사상가들의 중요한 주제였다. 리꾀르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예언자 나 고르기아스(Gorgias)의 소크라테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비판 그리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모두그 이론 체계와 접근 방법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악에 대한 고찰이다.
리꾀르는 권력의 악의 실례를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권력의 악의 대표적 실례는 독재이다. 독재란 인간 권력의지의 과도한 충족에서 생기는 광적 상태이다. 이 때 독재자는 난폭한 심리 현상을 그리고 피지배자는 굴종적 심리현상을 나타내어 권력의 병리현상을 보인다. 둘째는 부패한 입법 행위이다. 독재자는 자신의 악한 의도를 합법화시키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요청한다. 이 제도적 장치는 항상 합법성을 가장하는 입법행위에 의해서 생긴다. 그 결과 법의 합리성은 오히려 인간 소외의 도구가 되고 개인과 단체를 규율하는 제도 속에는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이나 계급의 사악한 열정이 이식된다. 셋째는 정치와 비진리의 상봉이다. 독재는 사물을 표현하고 인간의 의사 전달을 매개하는 언어의 왜곡 없이 절대로 발생하기 어려우며, 혹 발생한다 하더라도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독재란 반드시 의사 전달을 왜곡하는 철학의 타락과 함께 나타난다. 독재와 소피스트, 군주와 거짓 예언자의 결탁은 정치와 비진리가 만나는 현저한 실례이다. 비진리로 위장된 폭력, 타락한 철학으로 합리화 되는 독재는 건전한 이성과 담론의 세계를 부패시킨다. 독재, 부패한 입법행위 그리고 정치와 비진리의 상봉으로 대표되는 권력의 악은 그 사악성을 다른 영역, 즉 경제와 문화적 영역에 파급시킨다. 권력의 특징이 그 상위성에 있었던 것처럼 권력의 악도 상위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 결과 경제적 영역이나 문화적 영역은 권력의 영역에 종속되며 이와 더불어 권력의 악이 각 영역에 침투된다. 먼저 권력의 악이 경제적 영역에 파급되는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타인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살아가듯이, 인간의 경제 행위도 타인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개인의 소유 행위는 한 재화에 대한 제도적 재가에 의해 규정되므로 소유는 단순한 개인 현상이 아니라 집단 현상이 된다. 그런데 소유의 집단 현상, 즉 제도의 의해서 규정되어지는 경제 행위는 권력이라는 정치적 구조에 의해서 변화되어 질 수 있다. 그 이유는 사회 경제적 지배 관계가 궁극적으로 정치적 권력에 의해서 강제된 제도에 의해서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유 현상이란 한 국가의 정치적 영향력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결국 소유는 정치적 권위 하에서 그 합법성을 보장받게 된다. 국가는 법적 지배인으로서 경제 관계를 조회하고 소유관계 속에 권력의 힘 - 권력의 타락한 시기에는 타락한 권력의 악의 힘 - 을 불어 넣는다. 이때 권력의 차원에 종속된 소유의 차원은 권력의 악한 요구를 경제제도 속에 반영한다. 그 결과 타락한 경제 제도 속에 이식된 소유의 악은 착취와 수탈로 대표되는 잔인한 집단적 악을 합법성의 미명 아래 수행하게 된다. 이것이 경제 생활의 소외를 동반하는 권력의 악의 확산이다.
리꾀르는 이 같은 소유의 악의 예로 생산 수단의 독점적 전유를 든다. 생산 수단의 전유는 소유의 무죄적 차원에서처럼 노동을 인간 구현의 방법이 아닌, 오히려 비인간화의 도구로 만든다. 노동이 비동력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이 때 자본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물신(fetish)이 된다. 그런데 이 같은 생산 수단의 전유는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노동의 기술적 지배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 지배 관계를 재가하는 정치 체제에 의해 존립하게 된다. 한마디로 소유의 악은 국가의 권위에 의해서 재가되므로 집단적 차원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치를 매개로 한 문화적 차원은 상호배제적인 소유의 차원이나 서계적(hierarchical) 관계를 구축하는 권력의 차원과는 달리 타인의 존경과 인정으로 매개되는 영역이다. 이러한 영역 속에서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또 타인의업적을 인정한다.
이러한 상호 작용은 주로 집단적 문화 활등의 매체인 도덕이나 법, 기념비나 예술 작품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즉 인간은 가치로 매개되는 영역 속에서 혹은 집단적 이미지의 표출로 생긴 문화적 객체 속에서 집단적 상호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적 객체로 표현되는 가치의 차원 또한 국가의 위대성을 추구하는 독재적 권위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서 재가되고 차용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결과 자연스러운 인간 교류의 수단이던 문화적 객체는 일정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도구가 되며 왜곡된 인간의 이미지를 표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권력의 악을 위하여 차용되는 대표적인 문화적 객체의 예는 혁명적 문학 작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어떤 체제가 이데올로기를 선택적으로 지자하고 자신을 은폐하고 특정 계급을 단죄하도록 만들므로 계급의 희생을 조장하고 수많은 인명의 피해 그리고 거듭되는 혁명 전쟁을 유발시켰다.
상징 또한 권력의 도구가 되며 심지어는 반란과 혁명의 도구가 된다. 상징의 조작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조정하여 권력자의 의지를 대중에게 은밀히 전달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 속에 인간의 범죄, 타락, 혼돈과 영적 문맹 상태가 언어의 상태로 내재해 있으며 이 때 상징은 악한 집단의 존재와 가치, 즉 타락한 윤리와 도덕을 묵시적으로 강요하여 정치적 타락을 유도하는 가치의 악을 창출한다. 이것이 권력의 악의 문화적 차원의 도구화를 통한 확산이다.
지금까지 논한 권력의 악에 대한 리꾀르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권력은 상위성과 양의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둘째, 권력은 그 자체로 악은 아니나 인간의 열정으로 말미암아 악으로 전환될 뿐이다. 셋째, 권력의 악의 실례는 독재, 부패한 입법 행위 그리고 정치와 비진리의 상봉 등이 있다. 넷째, 권력의 본질적 성격으로 인하여 권력의 악도 상위성을 가진다. 다섯째, 권력의 악은 경제적 영역의 악인 생산 수단의 전유를 재가하므로 그 힘을 다른 영역에 이식시킨다. 여섯째, 권력의 악은 예술 작품이나 상징을 통하여 문화적 영역에 악을 이식시킨다.
4. 국가 현상의 인식 권력은 그 자체로 악은 아니다.
인간의 열정으로 말미암마 악으로 전환될 뿐이다. 그런데 그 권력은 국가 속에서 구체화 된 성격을 가지고 존재한다. 특히 국가는 물리적 강제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하는 권위로서 권력의 악을 재가하여 국가의 정치적 태도 속에 수용한다. 이 때 권력의 악은 국가의 악으로 승격된다. 그 결과 권력은 국가 속에서 공식성과 합법성으로 위장된 악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본 장의 논의는 리꾀르가 말하는 권력의 악의 가장 공식적 형태로서 국가의 본질을 폭력과 합법성의 두 측면에서 살피고 이어서 본질이 국가 의지의 프리즘을 통하여 발생하는 두 기능 - 구속적 기능과 파괴적 기능 - 을 논하겠다.
리꾀르에 의하면 국가는 폭력적 실체이다. 국가는 본질상 폭력으로서 인간의 파멸을 막는 미봉책이며 또 폭력에 의해서 구성되고 유지되는 폭력적 실체이다. 따라서 인간의 정치적 실존은 "정통적 폭력(legitimate violence)"이라는 특성을 가진 국가의 폭력에 의해서 보호되고 인도된다. 아울러 폭력의 행사에 관한 한 모든 개인은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반대로 국가는 폭력의 문제에 대하여 최종적 판결을 내리는 권위이다. 국가의 본질적 구성 요소가 폭력이라는 사실은 특히 국가 설립 시에 폭력만이 국가 구성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리꾀르는 모든 국가의 시작이 자주 군벌 노예 소유자 불법적 정복자 그리고 유산 상속자의 폭력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국가가 폭력적 실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무저항 희생, 형제애나 아가페를 수용하는 윤리적 실체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국가가 기독교적 사랑의 절대적인 요구를 수용하려고 할 때 국가는 오히려 무질서와 불법적 폭력에 빠지게 된다. 국가가 일정한 교육의 기능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형제애적 교육은 아니며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교육이다. 이는 구성원이 범한 과실에 대해서 자비나 용서가 아닌 징계와 형벌을 부과하는 특성을 가진 폭력적 교육이다. 강압의 위협을 통해서 존중받는 법을 만들고 형벌의 두려움으로 구성원을 계몽하는 국가만이 존재할 수 있다.
국가는 전적으로 사랑의 윤리를 폭력으로 대체하는 힘의 논리에 기반한 질서이다. 이러한 폭력적 실체인 국가는 합리성을 차용한다. 폭력이 국가의 본질적 요소라 할지라도 합리성을 가지지 못하는 국가는 그 자체로 내구성을 가지기 어렵다. 국가는 제도로 표현되는 합리적 외피로 비합리적 폭력을 위장한다. 합리성은 국가의 본질이라기 보다는 단지 국가의 존립 목적을 이루기 위해 차용되는 수단의 총화이다. 이 같은 합리성의 수단은 국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게 된다. “최초의 폭력이 전횡적인 것으로 시작되어 법과 제도적 장치를 가진 합리적 폭력이 되어 국가가 안정된다”고 말한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폭력적 국가는 합리성의 제고를 통하여 부단히 발전되어 왔다. 국가의 합리성 제고의 대표적 예는 인간이 정치 체제에 대한 투쟁을 통하여 성취된 인간성의 법적 문화적 진보이다. 특히 이러한 인간성의 제고는 제도를 통하여 영속화 과정을 밟으므로 국가 속에 합리성을 정착시킨다.
리꾀르는 국가의 합리성 증대를 나타내는 제도적 발전을 네 가지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첫째는 독재로부터 입헌 국가로의 이행에서 합리성의 증대를 찾아볼 수가 있다. 국가의 합헌성(constitutionality)은 권력의 행사를 위한 정통성을 확보하는 제 일차적인 도구이다. 둘째는 행정(administration)이라는 도구를 통한 권력의 합리화 과정이 있다. 명실상부한 오늘날의 국가는 정치적 책임을 추궁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결정을 정교화하고 실행하는 관리체(the body of functionaries)를 구성하는 능력을 가지는 데까지 발전되었다. 정치적 중립체로서 공공 행정의 존재는 정치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개도국에서 보여지는 공공 행정의 발전은 기술적 합리성의 제고이다. 국가는 행정을 통하여 기술적 전문성을 심화시킨다. 셋째, 제도적 합리성의 진보는 현대 국가가 정당 이익 단체 조합 및 각종 단체로 하여금 여론을 형성하여 국가의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하도록 대규모의 공적 토론의 장치를 만드는데 있다. 정당이나 조합의 투사와 간부 저널리스트 기자 혹은 잡지의 주필 등은 이 방면의 새로운 관리자가 되었다. 독재 정치를 옹호할 수 있는 명목적 입헌 국가보다는 제도화 되고 조직화 된 수단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는 가능성의 향상은 국가제도 발전의 좋은 지표이다. 넷째로 국가적 차원의 “대규모적 계획”이 국가 합리성 증대의 최근 형태이다. 특히 현대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대규모 경제 계획은 국가 합리성의 극대화 된 표현이다.
리꾀르에 의하면 국가는 폭력적 실체이며 따라서 희생과 무저항의 윤리적 틀 속에서 논의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는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국가가 인간 공동체를 생존시키고 한정된 수준의 도덕적 성숙을 위해 강압적 교육을 실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가 합헌성, 공공 행정, 공적 토론의 조직 그리고 대규모 국가 계획 등의 합리적 도구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국가를 전적으로 선하다고 할 수 없다. 국가의 모든 제도적 발전은 권력의 확대와 함께 독재의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폭력과 합리성은 국가의 본질적 구조일 뿐이지 도덕적 선악 판단의 대상에서 잠시 유보되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국가가 의지”라는 사실에 있다. 국가가 의지라는 의미는 국가가 의지 행위를 한다는 것, 즉 정책 결정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역사상 국가는 결정(decisions)을 통하여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의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결정(decisions of historical import!)을 배제할 수 없다. 국가의 결정은 인간 집단의 운명을 변화시킨다. 상황을 분석하고 가능한 계획을 수립하며 결정이라는 의지 행위를 구사하는 국가는 매 결정마다 국가 자신의 가치와 의도를 국가 행위 속에 주입시킨다. 윤리적 선악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은 폭력이나 합리성 그 자체가 아니라 이들에게 일정한 가치와 의도를 넣는 국가 의지이다. 국가 의지는 국가의 본질적 요소인 폭력과 합리성을 파괴적 기능으로 혹은 구속적 기능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의 의지 행위로 국민의 의지를 통일시킬 때 사회 집단은 보다 안정된 정치 조직으로 정착하는 적극적인 측면이 있지만 또 한편 국가는 이때 생기는 거대한 힘으로 공포와 격노, 인격 모독과 오만한 자존심을 담은 폭력적 언어를 구사하는 부정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5. 국가의 구속적 기능과 파괴적 기능
국가의 본질적 요소인 폭력과 그것에 차용되는 합리성은 그 자체로서는 도덕적 판단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폭력과 합리성 속에 일정한 의도와 가치를 주입시키는 것은 국가 의지이다. 국가 의지 작용의 결과는 두 개의 상이한 기능, 즉 구속적(redemptive) 기능과 파괴적(destuctive) 기능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국가는 인간성을 증진시키는 긍정적 발전과 진보의 기회가 되거나 또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권력의 악을 드러내기도 한다. 리꾀르는 이중적 국가 기능에 관한 통찰력을 성경에 나타난 국가에 대한 의미 있는 두 상징의 해석에서 얻는다.
리꾀르가 말하는 두 가지 상징은 관원(magistrate)과 짐승(beast)이다. 리꾀르에 의하면 이 두 가지 상징은 각각 국가 기능의 구속적 측면과 파괴적 측면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다. 리꾀르는 이 두 가지 상징, 즉 관원과 짐승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관원은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서 행정이나 치안을 유지한다. 그는 국가의 힘을 위임 받고 합리적 제도를 운영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관리자이며 또한 정치적 무력을 가지고 정의의 수호와 제도의 유지를 위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심판자이다. 관원이라는 상징으로 표현된 국가는 국민에 대해서 호의적이 아니며 시민의 실수에 대해서 용서도 없고 악에 대해서는 악으로 대가를 지불한다. 관원으로 나타난 국가는 단지 제도의 합리성을 가지고 통치하는 합리적 국가이다. 이는 무력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강압적 교육을 시행하는 국가이다. 이는 무력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강압적 교육을 시행하는 국가이다.
반대로 짐승으로 표현된 국가는 합리적 기능과 질서의 유익을 왜곡하므로 권력의 악을 낳는 사악한 국가의 상징이다. 이러한 국가는 미혹의 힘으로 피치자를 기만하고 국가 위신을 높이려는 위대성을 추구하여 국가 숭배를 강요하는 우상화 된 국가이다. 그것은 허위와 환상에 의해서 존재하며 인간성을 파괴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짐승으로 표현되는 국가는 권력의 악 때문에 완강하게 불신 되어지는 국가이다. 관원의 상징은 국가의 구속적 기능을 뜻한다. 여기서 국가의 구속적 기능이란 인간성을 유지 고양시키는 국가의 긍정적인 기능이다.
이 구속적 기능은 다시 강압적 교육 기능과 질서 유지 기능으로 세분되는데, 이 때 국가의 교육은 물리적 강제력을 사용하는 폭력적 교육이며 정치적 교육이다. 인간의 사악한 열정을 제한하는 폭력과 징치는 국민에게 법의 준수를 강요하고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며 국가를 견고하게 조직하고 유지시켜 국민을 역사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양육시킨다. 그 결과 국가 교육은 국민의 혼란과 파멸을 막고 오히려 인간의 지식 문화와 복지를 증진시켜 인간이 객체화 수단화 되는 것을 방지한다. 다시 말하면 국가는 교육을 통하여 구속적 기능을 수행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국가가 강요하는 일반적 법의 시행은 결코 인간성의 완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아가페적 교육을 보호하고 또는 형제애적 교육과 조화를 이룰 뿐이다.
국가의 두 번째 구속적 기능은 질서의 유지이다. 교육 기능과 함께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국가의 구속적 기능으로서 국가의 질서 유지 기능이 있다. 인간은 지식과 문화의 발전으로 인한 성숙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항상 이기적 열정과 투쟁적 성향을 드러낸다. 국가는 법과 제도로서 이기적 행동과 투쟁을 제한하고 징치한다. 아울러 국가는 일반적인 정의를 강요하여 국민이 무정부적 혼돈과 무질서에 빠지는 불행을 저지한다. 인간은 이때 질서 유지의 결과인 여가와 평화를 선용하여 예술과 문화 등을 고양시키고 인간이 객체화 되는 것을 방지한다. 짐승으로 표현된 상징은 국가의 파괴적 기능을 가리킨다. 국가의 파괴적 기능이란 권력의 악에 의해서 인간성을 피폐화하는 국가의 부정적 기능이다. 리꾀르는 전술한 바와 같이 권력의 악의 예로서 독재, 부패한 입법 행위, 정치와 비진리의 상봉 등을 드는데, 국가 속에서 이 같은 권력의 악은 더 이상 한 정치 집단의 특성이 아니라 국가의 차원에서 한 정치 질서를 망라하는 공식화 된 모습을 보인다.
권력의 악의 첫 번째 특징인 독재는 국가 속에서 합리성 증가의 표지였던 헌법을 독재의 알리바이를 위한 수단으로 변화시킨다. 독재자는 헌법을 폐지하기 보다 헌법을 이용하여 국민을 객체화 시킨다. 아울러 합리성의 지표이던 중앙 행정은 사회의 극한에까지 영향력을 강화시킴으로 독재자의 의도를 철저히 시행하고 주입시키는 조직적 영구적 인간 탄압의 도구가 된다. 여론 조직 기술 또한 독재를 합법적으로 보호하는 이념주의 수단으로 타락된다. 정당이나 사회 단체도 독재자의 슬로건이나 계획을 선전하는 역할을 한다. 거대한 국가 계획조차 비인간화의 도구가 된다. 국가 계획에 의한 생산수단 고용 설비와 자본의 독점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문화 예술과 사상의 독점은 독재를 가공한 힘으로 무장시킨다.
더 나아가서 국가 계획은 국민에게 규정된 행동윤리를 제공함으로 인간을 종속시킨다. 독재는 또한 종종 비진리와의 상봉을 통하여 국가를 정신적으로 왜곡한다. 정치와 비진리의 상봉은 인간의 본질적 요소인 언어와 폭력의 영역을 모두 파괴시킨다. 독재자의 소피스트의 만남은 폭력의 세계와 언어의 세계가 모두 타락되는 대표적인 예이다. 독재자는 소피스트를 통해서 사실을 왜곡한다. 그 이유는 언어의 타락과 의식의 강점 없이 어떠한 혁명적 변화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조야한 표현이나 암묵적 행위가 아닌 유혹과 설득을 통한 증오, 범죄적 열정의 유도만이 독재자의 목표를 위해 희생과 죽음을 강요할 수 있으며 다양성을 부정하는 경직된 대이념의 구축과 권위에 의한 진리 통일의 결과인 정신적 동질화 만이 위대성을 추구하는 권력의 열정을 만족시킬 수가 있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성은 인간의 유죄성과 만나고 폭력과 언어의 허위적 혼합체인 대이념과 진리의 강압적 통일은 인간성의 파괴로 귀결된다.
국가의 역설적 두 기능에 대한 리꾀르의 주장은 국가를 파괴적 기능이나 구속적 기능의 한 면으로 조망하려는 환원론의 오류를 거부한다. 환원의 오류에 빠진 정치적 광신주의는 무정부주의와 국가지상주의이다. 무정부주의란 국가의 파괴적 기능을 과대평가하여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입장이다. 국가는 파괴적 기능과 함께 구속적 기능을 가진다 . 그러므로 국가의 파괴적 기능과 함께 구속적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국가의 파괴적 기능만을 보고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적 순수주의는 국가의 구속적 기능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리꾀르에 의하면 국가는 선하다. 유명무실한 권위도 인간의 선을 위해서 일하는 측면이 있다. 순수성 유지와 진리 수호라는 표지 하에서 국가를 단죄하는 것은 최소한의 정의를 위해 교육과 질서 유지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의 역할을 경시하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무용론은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어떤 구조도 없는 세계를 원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허약성과 악에 대한 친화성을 망각한 데서 생기는 근시안적인 견해이다. 정치적 질서는 오히려 타락을 향해 열려진 인간의 열정을 부분적으로 억제하는 도구이다. 국가지상주의란 국가의 구속적 기능만을 과대 평가하여 국가를 절대적인 우상으로 만들려는 입장이며 국가를 정신적 세속적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는 신적 기관으로 보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가는 단지 세속적 기관이며, 인간성을 구원하거나 인간의 가류적 열정을 치유할 수 없다. 국가가 국가의 위치를 찾아 자신의 통제 속에 모든 가치와 정신 사조를 복속시키고 숭배 받는 절대 국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가 정치 지도자를 사제로 그리고 국민을 평신도로 바꾸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지 않는 한 정치는 건전할 수 있다”고 리꾀르는 말한다. 한마디로 국가는 폭력적 실체이다. 폭력적 실체인 국가는 힘의 윤리에 의하여 규율 되므로 형제애와 희생의 윤리, 즉 아가페의 윤리로 규정되는 종교의 영역과 분리 되어져 있다. 국가는 그 결과 교회의 영역처럼 순수의 법칙이나 흑백 논리의 법칙을 추구할 수 없다 .국가는 절대적 선의 추구가 아니라 상대적 선의 추구, 무죄성의 유지가 아니라 유죄성의 제한을 그 목표로 한다.
따라서 국가가 도덕적 순수와 거룩함의 표지 아래서 신성한 정치를 만들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악한 열정이 만연하는 정치의 세계에서 국가가 선의 유혹을 좇는 것은 선 그 자체의 파괴뿐 아니라 국가의 효율적 살인을 향한 광기를 자극시키게 된다. 그와 동시에 국가가 그 영역과 목표 그리고 수단이 세속적이며 비고백적이라고 하여 그 존재를 부정할 수도 없다. 단지 국가는 자신의 가치를 폐기하지도 절대화 시킴도 없이 합리성과 국가의 악의 역설적 긴장관계 속에서 구속적 기능과 파괴적 기능의 이중성 속에서 조망 되어져야 한다. 국가의 이중성 ? 합리성과 비합리성(국가의 악)의 공존 구속적 기능과 파괴적 기능의 공존 ? 은 국가란 한계 지워진 실체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실천적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는 국가의 악과 그 결과인 파괴적 기능을 제한하고 국가의 합리성과 그 결과인 국가의 구속적 기능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6. 요약 및 결론
리꾀르의 국가에 관한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인간은 가류적 존재이다. 가류적 인간은 과도한 열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쾌락의 원리를 좇음으로 악을 범한다. 악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집단현상이 된다. 악에 의한 집단적 죄의 대표적인 것은 정치적 차원의 권력의 악과 경제적 차원의 소유의 악, 그리고 문화적 차원의 가치의 악이 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악 중에서 상위의 악은 권력의 악이다. 권력의 악은 소유의 악과 가치의 악을 종속시킨다. 권력의 악은 공식성을 가진 국가의 악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때 국가의 악은 독재와 부패한 입법행위 그리고 정치와 비진리의 상봉으로 나타난다. 이 국가의 악이 인간성을 파괴하거나 인간을 객체화 시킨다. 이것이 국가의 파괴적 기능이다.
아울러 국가는 폭력적 실체이다. 폭력적 국가는 폭력으로 인간의 집단적 열정을 제어하고 합리성을 차용하여 인간성을 고양시키기도 한다. 이것이 국가의 구속적 기능이다. 구속적 기능과 파괴적 기능을 동시에 소유한 국가는 절대화나 우상화가 될 수 없는 국가이다. 국가는 단지 인간의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국민을 생존시키며 제도의 존속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이 국가의 한계이다. 국가의 이중적 기능 ? 구속적 기능과 파괴적 기능 ? 에 의한 한계성은 국가지상주의나 무정부주의와 같은 극단론을 배제한다. 아울러 한계 지워진 실체인 국가는 또 다른 영역의 도움, 즉 종교의 도움이 필요하다.
리꾀르의 국가론이 말하는 바는 한마디로 악의 문제이다. 국가의 악은 권력의 악에서 시작되며 권력의 악은 다시 인간의 악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국가 속에 존재하는 기독교 정치 참여 역시 악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기독교는 악의 원인이 되는 개인적 죄의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집단적 이기심으로 인한 제도적인 악에 대하여 비판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의 제시를 통하여 역사의 종국에 나타날 신의 도성의 특징을 국가 속에 구현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 날의 도래까지 인간의 가류성이 극복되기 전까지 절대적인 국가는 절대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리꾀르의 국가론의 핵심이다. 국가의 한계는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이다.
결론적으로 리꾀르의 윤리적 국가론의 의의와 한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리꾀르의 국가론은 그의 의지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가 국가를 “의지”라고 파악한 것은 인간의 의지론이 국가와 같은 공동체의 분석을 위한 틀로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리꾀르의 국가론 연구는 정치와 종교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중요한 예가 된다. 특히 악의 문제와 관련된 리꾀르의 인간론과 국가론은 그 대표적 분야이다. 그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충족시키는 국가로서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적 영역의 자율성을 인정하려는 자유주의 국가를 옹호한다.
셋째, 리꾀르의 윤리적 국가론은 그의 신앙적 전통이 칼빈주의적 전통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루터파에 가까운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국가를 일반은총의 산물로 파악하므로 루터파의 이중적, 역설적 기능보다 긍정적 기능을 강조하는 편에 서 있다.
넷째, 리꾀르의 국가론을 인간의 죄론이라는 심원한 가르침에서 시작하여 권력의 문제, 그리고 국가의 문제를 윤리적으로 조명하므로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국가론의 한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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