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역사를 세대별로 정리해 봤다. 지극히 사적인 견해로 나눈 것이므로 이견이 있더라도 양해하시라.
1. 민주당 1세대 (민주당1(원조 민주당) – 신민당1, 민주당2)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민주당의 시작은 1955년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하여 反이승만&자유당 세력이 모여 만든 민주당1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위 ‘원조 민주당’ 되겠다.
신익희, 장면, 조병옥 등이 창당멤버였다.
4.19 혁명 이후 제 2공화국(의원내각제)에서 2/3를 넘는 의석을 차지하면서 ‘원조 민주당’은 전성시대를 맞는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치사가 늘 그래왔듯이, 집권 이후 민주당1은 고질적 신·구파 간 분쟁으로 구파가 신민당1으로 떨어져 나가버린다. 그리고 집권정당 민주당1도 5.16 쿠데타로 해산되고 만다.
1963년 정치규제가 풀린 뒤 민주당2이 다시 창당되지만 별 존재감이 없었다.
민주당 1세대는 그렇게 운명을 마감하였다.
兩金(김영삼, 김대중)
민주당을 논하면서 兩金(김영삼, 김대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주당1은 구파와 신파의 연합정당이었다. 구파에는 조병옥, 윤보선, 유진상 등이 있었고, 신파에는 장면, 박순천, 유진오 등이 있었다.
김영삼은 자유당 의원으로 출발했지만 민주당1으로 당적을 옮긴 다음 민주당1 구파의 차세대 주자가 되었다.
좀 더 늦게 정계에 입문한 김대중은 민주당1 신파의 젊은 기수로 자리매김 한다.
민주당1 신·구파는 윤보선 대통령 - 장면 총리 시절 불안정한 균형을 유지하다가 결국 갈라서게 된다.
2. 민주당 2세대(신민당2)
反박정희&공화당의 목표아래, 분열된 보수 야당세력이 연합하여 1967년 2월 7일에 신민당2을 창당한다.
1967년 제 6대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패배한다.
‘40대 기수론’의 김대중이 1971년 제 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와 치열한 선거전을 벌였으나 패배한다.
1974년 4월 유진산이 사망하고, 김영삼이 총재가 되었으나 당내파동으로 실권하게 된 후, 이철승이 당권을 장악하여 집단지도체제로 대여(박정희/공화당) 온건노선으로 선회하게 된다.
1978년 제 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신민당2이 유효득표수에 있어 여당인 민주공화당보다 1.1%나 앞서는 승리를 거두고, 3년 만에 다시 당권을 잡은 김영삼은 더욱 대여 강경노선을 취하여 국회의원 제명처분을 받는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사망으로 김대중이 복권되자, 신민당2 내부는 김영삼계와 김대중계로 분열 대립하는 와중에서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제 5공화정 헌법에 의하여 다른 정당과 함께 자동해체 된다.
3. 민주당 3세대(민주화추진협의회, 신한민주당)
민주당의 역사를 논하면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83년 5월 김영삼의 단식농성, 같은 해 8월 김대중·김영삼의 8·15공동선언 발표를 계기로 야당세력의 兩金 세력이 힘을 합쳐 1984년 5월 민추협을 결성한다.
민추협은 김영삼과 해외체류 중인 김대중을 대신하여 공동의장대행에 김상현을 추대하고, 각종 성명서 및 기자회견을 통하여 반정부활동을 펼쳤다.
구신민당2 인사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신민당3)의 창당을 주도, 대부분 구성원은 신한민주당으로 합류하게 된다.
신한민주당이 제 12대 국회에서 제 1 야당으로 부상한 후에도 민추협은 원외에 남아 김영삼·김대중의 활동기반으로서 신민당과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김영삼의 신민당 입당 이후 역할이 축소된다.
그리고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兩金의 분열로 인하여 결국 해체된다.
제 5공화국 출범과정에서 이른바 ‘정치정화법’으로 묶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정치인들이 1984년 11월 정치활동금지조치가 해제되면서 反전두환&민정당(민주정의당)을 위해 신민당2 인사들과 민주화추진협의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1985년 1월 신한민주당(신민당3)을 창당하게 된다.
창당과 함께 맞은 제 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지역구 50명, 전국구 17명 등 67명의 당선자를 내어 제1야당으로 급부상 한다. 선거를 불과 25일 앞두고 창당되어 이와 같은 성과를 보이자, 무소속과 민주한국당 소속 정치인들이 대거 입당함에 따라 103명의 의원을 가지는 거대야당이 된다.
그러나 당 외 정치인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영향 밑에 강경일변도의 대여투쟁을 함에 따라 이에 반대하는 비민추계 정치인들의 반발과 이탈로 위기를 맞자 이민우총재는 兩金의 영향력을 배제하기위해서 전두환정권이 주장하는 내각제개헌을 받아들이기로 하는 ‘이민우 구상’을 발표한다.
이에 兩金의 지지자들이 집단탈당하여 1987년 5월 1일 통일민주당(민주당3)을 창당함으로써 신한민주당은 약화되었으며, 1988년 4월 26일에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선 거에서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여 정당법에 따라 등록이 취소 되었다.
4. 민주당 4세대, 兩金시대(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꼬마민주당)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민우 구상'에 반발하여 1987년 4월 8일 이민우 계열만 신한민주당에 남겨둔 채 兩金을 추종하는 신한민주당(신민당3) 소속 국회의원 74명이 탈당하여 “대통령중심 직선제개헌 추진, 비폭력적·평화적 민주화투쟁, 진정한 민주화와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할 수 있는 선명하고도 강력한 국민적 정당을 창건하겠다"는 창당발기 취지문과 함께 김영삼 총재, 김대중 고문 체제로 통일민주당(민주당3)을 창당한다.
통일민주당은 ‘6월항쟁’에서의 주도적 역할로 ‘6·29선언’을 이끄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그러나 제 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후보가 되려는 兩金의 분열로 김대중이 그 해 10월 말 탈당하여 12월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한다.
대선에서 兩金의 분열로 36.6%에 불과한 득표율로 노태우 대통령에 당선된다.
1988년 4월 총선에서도 국회의원 의석을 59석밖에 얻지 못하여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에 이어 제2야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1990년 1월 통일민주당은 민주정의당(노태우),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 함께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3당합당’하여 자동해체 된다.
‘3당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민주당3) 잔류파 5인(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김광일, 장석화)과 박찬종, 이철이 주축이 되어 1990년 6월 민주당4을 창당한다.
공식적인 당명이 민주당이지만 ‘꼬마민주당’으로 불려졌고, 그렇게 기억되고있다.
1991년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참패하자 야권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그 해 9월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신민당4)과 합당함으로써 1년의 정당생명을 마감한다. 이로써 김대중과 이기택의 공동대표체제가 구축되어 정통 보수야당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평화민주당을 살펴보자.
1987년 5월 1일 김영삼과 함께 신한민주당(신민당3)을 와해시키고 통일민주당(민주당3)을 창당한 김대중은 대내외의 후보단일화 압력을 뿌리치고 제13대 대통령후보 출마를 위해 같은 해 10월 29일 민주당 내 동교동계 의원을 탈당시키고 분당을 선언, 11월 12일 창당대회를 열고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출범시킨다.
그러나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3위에 그친다.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하고 야권통합의 압력 속에 1988년 2월 문동환목사 등 재야인사 98명을 영입하여 당을 재정비, 총선에서 호남지방의 37개 선거구를 석권하고, 서울에서도 다른 당을 압도하는 17석을 획득하여 전국구 16석을 포함, 71석을 차지함으로써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다.
1991년 4월 신민주연합당(신민당4)으로 이름을 바꾸고, 9월 10일 통일민주당(민주당3) 잔류파 세력인 꼬마민주당(민주당4)과 합당한 후, 당명을 신민주연합당(신민당4)에서 민주당5으로 바꾼다.
‘민주당 5세대’로의 전환이었다.
여기서 잠간 ‘민주당의 정통성’에 대해서 논해 보기로 하자.
(사실 이렇게 긴 글은 처음 써 본다. 그리고 그 목적이 2가지 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명목상의 민주당의 정통성은 김영삼에게 있었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과 그 이후 정당은 분명 ‘정통 민주당’의 분열세력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의 ‘3당합당’이라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비틀어버리는 변절로 인해 그 ‘정통성’이 자연스레 김대중에게 넘어왔다.
김대중의 ‘민주당’이라는 당명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신민당’은 일종의 ‘서자’와 같다. ‘민주당’에 대한 콤플렉스를 나는 ‘신민당’이라는 이름에서 발견한다.
여기서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 바로 꼬마민주당(민주당4)이다. 꼬마민주당이 존재함으로써 김대중은 ‘민주당’이라는 당명 대신 신민주연합당(신민당4)이라는 이름을 써야 했다. 그리고 미미한 존재인 꼬마민주당(민주당4)을 흡수함으로써 ‘민주당’이라는 당명을 획득하게 된다.
이것은 아주 이례적인 ‘사건’이다. 거대정당이 존재감도 미미한 초미니 정당을 흡수하고 당명을 초미니 정당의 ‘민주당’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리고 이기택을 공동대표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정통성’을 김대중에게 부여한 존재는 누굴까? 초기에는 이기택이었지만 마지막까지 김대중과 함께한 노무현이 바로 ‘김대중의 민주당의 정통성’을 담보해 준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노무현과 김대중의 관계다. 너무 노빠틱한가?
나는 ‘공식적인 민주당의 정통성’은 노무현이, ‘실질적인 민주당의 정통성’은 김대중이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의 민주당의 실질적인 뿌리는 평화민주당(평민당) 또는 민주당5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