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무리하셔서라도 하루 일찍 올라오실 수는 없는지 여쭈어봅니다.’
최근 출간된 박원순 시장의 책 <희망을 걷다>(도서출판 하루헌)에는 당사자가 밝힌 박원순·안철수 단일화 과정의 속내가 자세히 쓰여 있다. 회동을 제안하며 박 시장이 안 전 후보에게 보낸 이메일이 실려 있어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전후 사정이 드러났다. 이 책에는 박 시장의 이메일 내용만 실려 있다. 위에 실린 안 전 대선후보의 이메일 내용은 책에 공개되지 않았다.
지난 2011년 9월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수피아홀에서 만난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 입장을 발표한 뒤 포옹하고 있다.
<희망을 걷다>는 2011년 7월 19일 박 시장이 지리산에서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며 매일 쓴 일기다. 49일 동안 험난한 산행을 계속하며 그가 본 현실과 생각의 변화를 통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에 뛰어들게 된 정치적 결단의 과정이 솔직히 기록되어 있다. 책에 따르면 세상과 무관하게 산길을 걷던 그에게 주변의 출마 제안이 몰려온 것은 8월 하순쯤이다. 지인들까지 백두대간으로 찾아와 출마를 강권했다.
결국 백두대간 종주 45일째인 9월 2일, 박 시장은 잠깐 마을에 내려와 안 전 후보에게 한 통의 이메일을 보냈다. “우연히 오늘 이야기를 듣자니 안철수 교수님도 서울시장 후보를 고민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안 교수님의 역량이야 그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늘 저를 도와주셨고 또 함께 해오셨기 때문에 오히려 제가 큰 도움을 얻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정치를 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늘 그런 뉴스가 뜨는 것을 보고 과연 안 교수님이 그런 생각을 하실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선거 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던 박 시장에게 안 전 후보의 출마설은 큰 충격이었다. 서로가 정치권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활동하다가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이다. 자리를 두고 두 사람이 다투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박 시장은 결국 안 전 후보와 만나 그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고 판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지금 어떤 상황이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런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생각이 비슷하다면 서로 힘을 합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9월 10일 전후에 종주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텐데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지금의 시국과 향후의 대응방안에 대해, 그리고 협력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안 전 후보로부터 즉각 답신이 왔다. “저도 나름 적지 않은 고민을 해왔습니다. 종주에서 돌아오시면 뵙겠습니다.”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담겨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고민을 해왔던 것을 확인했다. 안 전 후보의 단호한 결심을 보고 박 시장은 양보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그 또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숨 가쁘게 단문으로 메일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서로 일정을 조율하고, 빠른 만남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감했다. 결국 9월 6일 오후 2시, 언론의 시선을 피해 서울 시내 모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박 시장은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무리짓고 하산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정치권으로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고 있었으나 단호히 거부했던 전력이 있다. 특히 박 시장은 정부 요직과 서울시장 출마 등의 구체적인 제안을 거절해 왔다. 그런 그들이 갑자기 정치 일선에 뛰어들게 된 배경과 심경은 박 시장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과연 나만 혼자 깨끗하게 살아도 되는지, 내가 역사와 민족, 시대에 대해 큰 죄를 짓는 것이 아닌지 하는 고뇌가 깊어졌다. 백두대간 산행을 시작할 때, 이미 이 점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걷는 걸음 하나, 보는 나무 하나, 딛는 돌 하나에도 나의 고민은 담겨 있었다.”
‘희망을 걷다’(박원순의 백두대간 종주기)
전해진 바로는 박 시장의 결연한 의지와 계획에 안 전 후보가 공감하여 전격적인 양보가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회동에 배석했던 시골의사 박경철씨는 안 전 후보의 언론 발표 후 눈물을 보였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박 시장과 안 전 후보의 직접적인 인연은 2003년 POSCO 사외이사를 함께 하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 모두 일에 몰두하는 성격이며, 자신의 영역에서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었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공통점이 있었다.
박 시장 측근에 따르면 두 사람간의 개인적 만남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다만 사회적 이상에 대해 일정 부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박 시장이 벌인 일을 안 전 후보가 적극 돕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아름다운 가게의 아름다운 토요일 행사 강연에 안 전 후보의 참여와 동참이 있었다. 특히 시민사회운동 활동가 교육을 위해 시작한 소셜 디자이너 스쿨(SDS) 2기 수업을 KAIST에 재직하던 안 전 후보가 맡아 10회 이상 대전에서 서울을 오가며 강의를 진행했다.
안 전 후보는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아름다운재단의 이사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