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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와 로드리게즈
-두 개의 영화제에서 만난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난 여름 나는 제천 국제 음악 영화제와 노무현 영화제라는 두 개의 영화제에 다녀왔다. 제천 국제음악 영화제는 올해 나이가 열 살, 그 나이만큼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국내외 초청 상영작도 적지 않았고, 한 여름 밤의 락페스티벌 등 다채로운 부대 행사들도 호응을 얻었다. 제천 시내와 의림지 청풍 호반 무대를 오가는 영화 매니아들의 발걸음이 싱그럽게 느껴졌다. 기획에서부터 흥행까지 박수 쳐 주고 싶은 영화제다.
나는 이 영화제에서는 미국의 이름 없는 가수 로드리게즈의 드라마틱한 일생을 다룬 ‘서칭 포 슈가맨(Searching for Sugarman)'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고, 한 대수의 락페스티벌을 즐겼다. 행사가 끝나고는 초대해 주신 분의 배려로 공연에 참가한 가수들과 어울려 송어회에 소주잔을 많이 비웠다.
노무현 영화제는 서울 종로 도심 한복판에서 <다섯개의 민주주의>라는 테마를 걸고 올해 처음 시도된 영화제다. 부산 국제영화제 등의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상업 이익을 내세운 전문 영화제는 아니다. 노무현재단이 고인이 되신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와 철학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려는 의도에서 기획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상업 이익을 목표로 한 영화제가 아닌만큼 상영작들은 민주주의, 인권, 평등, 평화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올해는 그 시도가 처음이어서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의 반응을 많이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일단 극장 객석을 찾은 관람객의 숫자와 상영된 영화들의 수준을 보면서 노무현 영화제를 얇게라도 평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앞으로 가능성이 있고, 타 영화제와 연대하면 크게 발전 하겠다> 정도의 평가를 나름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노무현 영화제에서는 마지막 날 넬슨 만델라의 전기 영화인 ‘자유를 향한 머나만 여정’을 보았다. 영화가 끝난 다음에는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자그만 식당에 들어가 낙지 불고기에 소주 한잔을 곁들였다. 이런 감동에는 소주 한잔이 더해지면 흥이 되는 수가 있다.
나는 이 두 영화제, 두 편의 영화에서 우연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만났다. 넬슨 만델라와 로드리게즈라는 각기 다른 두 사람을 내세웠고, 극 영화와 다큐 영화라는 형식은 달랐다. 전기 영화라는 공통점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무엇이 있을까. 그런데 나는 뜻밖에 대통령과 무명 가수라는 두 사람에게서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이 공통점은 다분히 주관적이긴 하지만 역사 기록도 다분히 기록자의 주관이듯이 영화 감상평 정도야 주관적이라고 해서 누가 뭐라 할 것 같지 않은데 실제로 나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남아공과 우리나라는 근현대사의 민주화 과정이 많이 닮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만델라가 비교가 되면서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다. 만델라는 청년 시절 아프리카 민족회의 가담 이후 그의 인종 차별 철폐 등의 저항과 28년간 로벤섬 감옥 생활을 했다. 그의 일생이 고스란히 남아공 민주화 투쟁에 바쳐졌다. 긴 감옥 생활 동안 다져온 화해와 평화에 대한 신념은 세계인들이 존경하고 우러를만한 가치 있는 철학이 되었다.
“우리가 무관심과 냉소, 이기심 탓에 휴머니즘이라는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지 못했다는 말이 미래 세대에게서 나오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합시다. 인도주의가 더이상 인종주의와 전쟁이라는 별이 없는 한밤중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고 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이 옳았음을 우리가 증명하도록 노력합시다. 진실한 형제애와 평화가 금과 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지다고 말한 그가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었음을 우리 모두가 증명하도록 노력합시다.”
만델라의 1993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이다. 1994년 흑인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남아공 대선에서 만델라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의 나이 일흔 여섯이었고,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여 화해와 관용, 협력 등의 신념을 실현해 갔다.
만델라가 감옥에 있는 기간은 1962년부터 1990년이다. 만델라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위니가 옥바라지를 했고, 그녀는 만델라가 없는 바깥에서 만델라의 역할을 했다. 위니는 극우 아파르트헤이트의 백인 우월주의에 맞서 폭력 투쟁을 이끌었다. 만델라는 감옥 생활 동안 더 이상의 폭력은 안 된다고 해서 한때 아프리카 민족회의와 흑인 사회에서 배신자라는 원성을 듣기도 했다. 출소 후에는 위니의 폭력 투쟁을 반대하면서 별거를 하기도 하고,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위니를 차관으로 각료에 포함 시켰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이혼을 하게된다.
만델라의 일생은 자유와 평등을 위한 불굴의 의지 자체였다. 만델라는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에서 영향을 받았고, 이는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에게 적잖은 영향을 준게 분명하다.
영화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은 그런 넬슨 만델라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영화이다. 인물 자체가 드라마다보니 사나리오가 어떻고, 배우 연기가 어떻고, 영화 음악이 어떻고 하는 것은 중요치 않아 보인다.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대단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제 부터는 <서칭 포 슈가맨>의 이름 없는 가수 ‘로드리게즈’ 얘기를 해 보자.
로드리게즈는 1970년 미국 디트로이트 강 다리 근처 조그만 술집에서 노래하는 무명 가수였다. 술집은 자동차 공장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손님이었고, 라틴계 혈통인 로드리게즈는 그 역시 노동자이면서 노래 값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노래 잘한다고 소문을 듣고 온 음반 기획제작자, 데니스코피와 마이크 시어도어가 찾아 오면서 로드리게즈는 인생의 전환점을 갖게 된다. 이들 음반 기획자들은 마빈게이와 스티비 원더 등 팝 최정상의 가수를 발굴해낸 사람들이다.
로드리게즈의 노래에 매료된 두 사람은 곧바로 한 장의 음반을 내게된다.
I Wonder (1970)
난 궁금해
넌 얼마나 많이 속아봤는지
난 궁금해
넌 얼마나 많은 계획을 망쳤는지
난 궁금해
넌 얼마나 많이 섹스를 해봤는지
난 궁금해
다음은 누구 차례인지
난 궁금해 정말 궁금해
(1970년, 로드리게즈 첫 음반 ‘콜팩’에 수록 된 곡. 슈가맨은 로드리게즈의 별칭이다)
리얼리티한 가사와 노래, 당시의 포크송이 그랬듯이 기타 하나와 흥만 있으면 노래가 되던 시절이었다. 음반 제작자들은 로드리게즈 이 사람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가수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1970년, 야심 차게 준비한 ‘슈가맨’의 첫 번째 음반 ‘Cold Fact’가 세상에 발표됐을 때 엄청난 인기를 예상했던 그들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평단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은 고작 6장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71년 발표된 두 번째 음반 ‘Coming from Reality’는 1집보다도 부진한 판매고를 보여 제작자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고, ‘슈가맨’은 무대에서 분신 자살, 총기 자살 했다는 미스테리한 소문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만다.
미국에서는 미스테리한 소문 속에 잊혀지고 있었던 로드리게즈의 이야기가 남아공에서는 영화처럼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앨범이 우연한 기회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어떤 여행자가 가방 속에 우연히 로드리게즈의 앨범 한 장을 챙겨 가면서 시작된 이야기이다.
로드리게즈의 이 노래는 극우 아파르트헤이트가 이끄는 백인 권력의 살인적인 폭력과 인종 차별에 맞서 저항하는 남아공 젊은이들, 평등과 자유를 열망하는 남아공 국민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여 들였다. 이 노래의 저항 의식은 로드리게즈를 남아공 국민 가수로 만들었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 우리나라의 조용필이라고 보면 엇비슷한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로드리게즈는 남아공에서 민주화와 혁명의 아이콘이 되어갔다. 남아공 정부는 ‘슈가맨’의 노래가 더 이상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금지곡으로 지정하고 라디오에서도 틀지 못하게 했다. 그럴수록 오히려 열광적인 팬들이 늘어났다. 그의 앨범은 5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플래티넘이 됐고, 남아공의 수많은 뮤지션들은 그의 노래에서 영감을 얻고 그를 추종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가수가 지구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완전히 새롭게 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엄청난 인기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게즈의 개인적인 삶은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특히 그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은 더욱 그러했다. 이에 남아공에 살고 있는 두 명의 열성 팬이 그들의 영웅에게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건지 답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고, 수년에 걸쳐 진행된 그들의 조사는 ‘슈가맨’에 대해 존재하는 그 어떤 소문보다 놀라운 사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전설의 록 스타, ‘슈가맨’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1997년까지 로드리게즈는 이 사실들을 전혀 몰랐다.
자신이 남아공 최고의 슈퍼스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디트로이트의 건설 노동자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두 명의 열성팬(음반 판매상과 평론가)과 ‘슈가맨’의 극적인 만남은 믿기 힘든 동화 같은 실화다. 1998년 로드리게즈는 처음으로 남아공에 초청 공연을 가게 된다. 그가 음반을 내고 28년 만의 일이다. 전설의 영웅 로드리게즈를 만나는 남아공 국민들을 상상해 보라.
다큐 영화는 특성상 인터뷰와 인터뷰어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서칭 포 슈가맨> 영화 속에서 인상적인 인터뷰 내용을 종합해서 로드리게즈를 설명할 수 있는 몇가지를 소개해 본다.
1. 디트로이트 빈민가에 살면서 건설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이어왔다. 잡부일을 해도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일을 할만큼 예술가적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했다.
2. 시민들의 집회와 시위에는 적극 참여했다. 시민 의식이 높았다. 디트로이트의 시장, 의회 선거에는 몇 번 출마도 했다.
3. 세 딸 중 둘 째 딸은 남아공에 공연 갔을 때 짐꾼 역할을 해 준 택시 기사와 결혼했다.(그 가난에서도 딸들은 반듯하게 컸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이 우리 나라 한석봉의 효심에 견줄 수 있을 듯 하다)
4. 남아공에서 많은 돈을 벌었고, 실제로 남아공에서 살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지금도 디트로이트의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만델라와 로드리게즈는 지구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문화와 인생을 살고 있었다. 감옥에 있었던 만델라는 이런 슈가맨의 이야기를 들었을테고, 위니는 이 노래를 부르며 민중들을 선전 선동 했을 것이다. 만델라와 로즈리게즈, 정치와 문화의 상호작용하는 힘이 남아공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두 개의 영화제에서 만난 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나는 깨에 있는 시민의 의식과 그 의식수준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들의 자유를 향한 열정을 보았고, 그들의 삶은 위대 했다.
내년 노무현 영화제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