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

청년

거울 앞에 서 본다. 내 모습 어떤가 하고 거울 앞에 참으로 오랜만에 서 본다. 이제는 새치라고 할 수 없는 흰머리카락, 볼살은 늘어지고, 펴지지 않는 눈가 주름, 틈새 벌어진 이빨, ‘아, 이제 내 청춘 다 갔구나’ 속 깊은 곳에서 한숨이 새어난다. 그래 사십대 종착역, 오십대 턱걸이인데 이런 모습 자연스러운게지.

청춘의 때가 있었다. 꿈 꾸고 소원하면 세상이 바뀔 것 같은 이삼십대 청춘이 있었다. 바흐만의 ‘삼십세’를 읽었다. <그대는 방정식을 풀 따름이다. 세계는 그대 가슴에 비길 것이 못 된다> 책을 읽고 난 뒤 뒷장 하얀 여백에 이렇게 메모를 해두었다. 검정 볼펜 글씨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곰팡이 핀 것처럼 파랗게 색이 바래지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었다. 마르크스 얘기대로라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망하고 공산 사회주의가 된다는 것인데 이십대 나의 가치와 신념에 경전이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은 구약 시편 23편처럼 달달달 외우고 다녔다. 이후 자본과 공산당 선언은 10년 주기로 한번씩 나의 감정을 건드리곤 했다. 공산당선언과 관련되어 블러그에는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전업 작가인 김부일이와 단골로 가는 종암동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 하기로 했다 한달에 한권씩 기계적으로 써야 겨우 먹고 산다는 그에게 힘이 되어 줄 몇마디 말이라도 거들어 주고 싶었다 돼지 목살 찌개에 모두부를 큼직하게 썰어놓고 그를 기다렸다 길 가다가 포장마차 안을 기웃거리는 행인에게는 밤 늦은 그 시간, 나라는 사람은 쇼윈도우에 장식된 낭만주의자 쯤으로 보였을테다 김부일이 나타났다 그는 혼자 오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칼 마르크스를 동행해서 나타났다 어떻게 같이 오게 되었느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십년을 주기로 한번씩은 만났던 탓에 이런 술자리가 자연스러웠다 또 십년이다 아니지 삼십대 초반 이후로는 오늘이 처음이다 그동안 어찌 지내는지 생각이 좀 바뀐게 있는지 우리 네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가며 술잔을 들었다 이별한 애인 얘기를 했고, 유전자 조작에 둔한 사람들, 그들의 야만적인 폭력에 대해서 분개 하기도 했다 시오니즘과 반시오니즘, 인간화와 비인간화, 노동중심성과 인간중심성,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 꼬막을 안주로 하나 더 내놓고 꼬막의 맛을 알려면 목으로 넘긴 다음 입을 다물고 콧바람을 내 보라고 했다 이 때 갯내음이 나면 맛있는 꼬막이라고 했더니 신기한걸 알게 된 것처럼 엥겔스가 제일 열심히 꼬막 맛을 음미했다 마르크스는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가을 석양을 이야기 하고 낙엽이 된 은행나무 잎 이야기를 하고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숲 속 벤치에 나란히 앉아 사랑을 나눌 어린 연인들 이야기를 하고나서야 마르크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막걸리며 맥주며 소주며 주종을 가리지 않고 어지간히 취했다 내 술잔에 뜨거운 것은 눈물 뿐이 아니었다 그대들처럼 햇불로 탔던 사상과 철학이 젊음일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에 못지 않은 젊음이 있다고 믿었다 다녀간 이름들도 많았고 그들은 여전히 내 기억 속 사랑의 노래로 남아 있다 어찌하랴 나는 여지껏 자유주의 자였고 앞으로도 그럴텐데 내 술잔 속에 고요히 떨어지는 달빛이 우리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를 읽었다. 이심전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글이었고, 나의 삼십대도 이렇게 정리되는 듯 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 보다는 운동가를

술 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것을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서른 잔치는 끝났다'> 전문

사업을 했고,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겠다는 소박한 뿌띠부르조아가 되어갔다. 글을 썼고, 다행히 발표할 수 있는 지면과 무대가 있어서 작가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산다는 것이 인생에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인지 고민했다. ‘이게 아닌데’ 하는 자괴감에 괴로워 했다. 그 때부터는 정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치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누구나 하는 생각을 마흔 넘어서야 갖게 되었고 유시민 작가를 알게 되었다. 다시 청년이 되어갔다.

푸른 산을 보라.

이글거리는 태양을 보라.

싱싱 불어오는 바람 앞에 서 보라.

젊음이 아름답다라는 말은 이래서 나온 말이지 않겠는가.

나는 그 청춘을 지나와 다시 청춘의 길로 간다.

청년은 내 심장에서 영원한 이름이며

다시 청년의 가슴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긴 전태일은 스무살 청년이었다. 군사정권의 독재와 맞서 항소이유서를 쓴 유시민은 스물여섯의 청년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를 여행 하면서 빈민 노동자의 처참한 삶을 보고 혁명가의 꿈을 카운 체게바라는 스물 셋의 청년이었다. 동학혁명 당시 황해도 접주로 활동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각오한 김구는 스무살 안팎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청년은 실패를 주저하지 않고, 전진만을 생각한다. 청년은 정의하고 겸손하다. 그대, 청년의 이름으로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