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는 왜 현실정치의 변화와 연결되지 못 하고 있는가? 인터넷 공간에서는 금새라도 MB정권 타도가 이루어질 듯 한데 왜 현실사회에서는 별 다른 파장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는가? 이는 언로를 틀어막고 여론을 억압하는 정권의 탓인가, 아니면 결사항전을 벌이지 못 하는 야당의 무기력 때문인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국민의 마음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 하면 촛불시위는 계속해서 필패의 프레임에 갇힐 수 밖에 없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어찌 되었든 여당은 국민의 선택으로 여당이 된 것이며, 야당 또한 거리에 서 있지 않은 다양한 국민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생각은 복잡미묘하며 단지 몇 가지의 성향으로 구분될 수 없다. 5천만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가히 백가쟁명이라 할 만큼 다양한 생각들이 혼재되어 있다. 어떤 사안에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데, 다른 사안에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지하는 사안조차도, 어느 정도의 선까지는 지지하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또한 아무리 참여인원이 많아도 거리에 선 국민들이 거리에 서지 않은 국민들보다 많을 수는 없다. 오히려 대개의 경우 거리에 선 국민들은, 그 인원이 수십만에 달해도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열심히 시위에 참가하고 다음 날 직장이나 학교에 가보면 별 다른 관심도 없고 냉담하고 의견도 각기각색인 동료들이 대부분이기 마련이다.
뜨거운 거리의 열기를 처음 경험한 이들에게는 이런 현실이 도리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두 번 물을 필요도 없이 당연한 진리로 인정된 주장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이 점을 직시해야 한다.
심지어 거리에 나온 수십만의 인파들 또한 그렇다. 하나의 쟁점에 대한 공통된 문제의식을 제외하고는 이해관계도 일치하지 않고 관심사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날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것이다. 같이 촛불시위에 참여한 이들도 다른 쟁점에서는 서로 반대의 입장에 서 있을 수 있다.
이는 한 이슈를 공론화하는 데는 긍정적이나 어떠한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데는 커다란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일시적 분노의 감정들은 진흙처럼 단단히 뭉쳐지지 못 하고 제각기 따로 노는 자갈처럼 거친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쉽기 때문이다. 마치 수증기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순식간에 흩어지기 십상인 것이다.
거리시위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거리는 뜨겁고 열정적인 민주주의의 장이지만 또한 평면적이고 2차원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거리시위는 저항의 수단이지 합의의 수단이 아니다. 합의는 어디까지나 직장과 학교 등 일상시기의 사회공간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합의는 진보세력과 평범한 국민들간의 합의, 거리에 서 있는 사람과 서 있지 않은 사람들 간의 합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한 데 묶을 수 있을지다. 거리의 열정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관심사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어떻게 녹여낼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막연한 공감대에만 의지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심정적 동조와 적극적 지지는 분명히 다르다.
기실 참여정부 시절 진보진영이 극심한 분열을 겪은 건 심지어 진보진영조차도 한 데 묶을 수 있는 공통의 합의가 부족한데 그 원인이 있다. 내부 분열이 극심한 와중에 어떻게 보수세력의 전방위적인 공세에 맞설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국민들에게 설득력있는 비젼을 제시할 수 있었겠는가.
공통의 합의를 이루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내실이다. 자기 실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상대편의 흠집을 파고드는 것만으로는 국민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쟁점들을 떠돌아 다니며 '유격전'을 펼치는 건 간혹 여론의 반향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실을 쌓는데 별 다른 도움이 되지 못 한다. 사안 하나하나를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으로, 진지를 굳건하게 다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고 단지 감성적인 반대에만 의존한다면 설령 집권을 한다 하더라도 또 다시 극심한 분열과 적대의 양상이 벌어질 것은 불보듯 뻔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 2.0등의 시도를 통해 고민했던 것도 바로 진보진영 내부의 토론과 성찰을 통해 내실을 다지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진보진영은 미디어에서도 학계에서도 정치판에서도 극히 소수의 세력이다. 애시당초 담론의 열세라는 핸디캡을 떠안고 출발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분지위를 막론하고 국민 하나하나가 지식인이자 오피니언 리더인 '시민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뜻이었다.
중국 명나라의 개국군주인 주원장의 핵심참모였던 이선장은 주원장에게 "성벽을 높이 쌓고, 양식을 모으고, 등극을 미루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성을 쌓는다는 것은 근거지를 탄탄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떠돌아 다니면 인재와 자원의 누수, 그리고 이합집산을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양식을 모은다는 것은 힘을 모은다는 의미다. 백성을 풍요롭게 하지 못 하면서 전투만 하게 되면 피폐함을 면치 못 하게 되기 때문이다. 등극을 미룬다는 것은 서두르지 않고 착실히 내실을 다진다는 의미다. 급하게 앞장서서 나아갔다가는 천명과 민심을 얻지 못 하고 도리어 표적이 되어 쉽게 진압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선장의 지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받는 건 바로 모두가 '시민 전문가'라는 각오로 치열하게 내부적 성찰을 진행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읽어야 할 책들과 치열하게 논쟁해야 할 주제는 끝이 없다. 오늘날 진보세력의 최소한의 공통적 합의점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서민의 이익과 공공선을 어떻게 일치시켜 나갈 것인가, 그리고 주변 4강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어떻게 남북평화를 이루어 나갈 것인지 등. 가능하다면 보수파의 책과 칼럼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 그들의 담론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의 논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촛불시위 필패의 프레임'을 극복하고, 거리의 열기를 사회적 합의로 이끌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꿈꾸었던 '서민 민주주의' 세상은 곧 '시민 전문가'의 세상이기도 하다. 이를 이룩하는 건 우리 2~30대 젊은 세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