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을 하려면?
오프라인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각자 입장이 있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할 때가 있고,그러다 보면 처음 하고자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모를 때가 있다. 심하면 감정의 앙금이 남는다. 나 또한 상대의 주장을 덮어서 나를 내세운 적이 많다.
'내가 옳다'란 전제하에,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할 경우 그것은 소통이 아니다. 한 방향을 강제하는 것은 군대와 같이 명령과 복종을 생명으로 하는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기에 유시민이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이 옳다고 해도, 무조건 유시민을 믿으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소통은 쌍방향이다.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다. 그러면 소통'을 하려면?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나서 타인 스스로 문을 열려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교수님)에 실린 글을 인용해 본다.
소통은 타인의 삶에서 출발합니다.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대전에 잘 알려진 운동의 창녀촌에는 '노랑머리'라는 여자가 있는데, 한 달에 서너 번씩 약을 복용하고는 도루코 면도날이나 깔창(유리창)으로 제 가슴을 그어 피칠갑으로 골목의 건달들에게 대어든다고 합니다. 온 몸을 내어던지는 이 처절한 저항으로 해서 그 여자는 기둥서방이란 이름의 건달들의 착취로부터 자신을 지킨 유일한 여자라 합니다.
이 여자의 열악한 삶을 그대로 둔 채 어느 성직자가 이 여자의 사상을 다른 정숙한 어떤 것으로 바꾸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여인을 돌로 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숙한 부덕이 이 여자의 삶을 지켜주거나 개선시켜주기는 커녕 오히려 무참히 파괴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똥치골목, 역전 앞, 꼬방동네, 시장골목, 큰집 등등 열악한 삶의 존재 조건에서 키워온 삶의 철학을 부도덕한 것으로 경멸하거나 중산층의 윤리의식으로 바꾸려는 여하한 시도도 그 본질은 폭력이고 위선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낸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소통은 나와 다름을 소중이 여기는 것입니다. 타인의 삶을 안 후, 소통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름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섬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 사람에게는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며, 서울 사람에게는 해는 빌딩에서 떠서 빌딩에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 사람이 산골 사람을, 서울 사람이 섬 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지구의 자전을 아는 사람은 이 우김질을 어리석다 깔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바다나 산이나 그런 구체적인 경험의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는가? 물론 없습니다. 있다면 머릿 속일 뿐입니다.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이며 순수한 의미의 관찰, 즉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가치중립적인 관찰이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떤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