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22일 월요일 책 구입/초판 1쇄 발행 1994년 1월 20일 / 초판 13쇄 발행 2003년 5월 15일 지은이:유시민 / 펴낸 곳: 도서출판 푸른나무
< 책 머리에 >
"역사란 무엇인가?" 오늘의 삶에 만족하여 내일을 모색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별로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의 생활에서 무엇인가 불만스럽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그래서 더 나은 미래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인간은 과거의 일에 비추어 봄으로써 현재를
더 깊이 이해하고,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 위에서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으며 또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거에 일어난 이런저런 사건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여기서 현대의 보통 사람이 역사에 대해 품는 소박한 의문을 해명하려고 한다. 역사는 어디에서 비롯하였는가? "이기면 충신이요. 지면 역적" 이라는 속담에서 보듯 역사란 그저 강자와 승자에 대한 예찬에 불과하지 않은가? 역사에는 선악을 가리는 기준이 있는가, 아니면 성인과 악당은 다 역사가가 자기 기분이나 취향에 따라 만들어 낸 인물인가?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이름없는
수많은 민중인가, 소수의 뛰어난 영웅과 천재인가?
역사는 어떤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가, 아니면 그때그때의 우연한 사정에 따라 이리저리 변화할 뿐인가? 역사에 진보가 있다면 그 진보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역사의 심판이란 정말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자기의 행동이 옳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위안을 얻기 위해 만들어낸 한낱 환상에 불과한가? 역사의 심판은 누가 어떻게 내리는 것인가? 역사가들이 쓴 역사는 얼마만큼 진실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 동서 고금의 역사가들은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책과 논문을 썼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역사학을 공부한 전문가도 아닌 주제에, 그 책더미에 또 한 권을 보태려 한다. 물론 강권하다시피 원고를 청탁한 출판사도 이 외람스러운 행위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할 터이지만 주된 책임은 그에 응한 나 자신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핑계없는 무덤은 없는 법이니만큼, 전문적인 역사 연구자가 아니면서도 감히 이런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몇 가지 밝힘으로써 독자 여러분의 넓은 아량과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첫째로 들 수 있는 이유는 '역사라나 무엇인가' 를 포괄적으로 다룬 책 가운데 평범한 독자나 청소년들이 읽을 많난 것이 드문 우리 독서계의 상황이다. 역사를 깊이 연구한 우리 나라의 역사가들은, 학게에서 역사가들끼리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너무 많은 탓이겠지만, 좀처럼 문외한들에게 친절한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처럼 훌륭한 책이 있지만, 이 영국인 학자는 주로 유럽 역사의 예를 가지고 역사를 설명하기 때문에 우리 독자에게는 '영양가는 풍부하지만 입맛에 맞지 않는 ' 생소한 서양 음식과 같다. 그래서 나는 '동병상련의 심정' 으로 이 책을 쓰면서 우리 나라 역사의 사례를 들어 역사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힘 닿는 만큼 애를 썼다.
둘째로는 꼭 전문 역사가가 쓴 책만이 좋은 책은 아니라는 격려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도의 독립 운동가 네루는 자연 과학과 법학을 공부한 정치가였지만 그가 쓴 [세계사 편력]은 전세계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이 책은 그가 독립 투쟁을 한 죄로 감옥에 있으면서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것이다. 나는 고등 학생 시절에 처음 이 책을 읽었는댜, 네루가 ㅏ' 조선과 중화 민국' 이라는 글에서 "조선의 소년들이 3.1 운동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고 딸에게 이야기한 대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셋째로는 외국 학자들이 몇십 년 전에 쓴 책이나 우리 나라의 나이 든 세대의 학자들이 쓴 책과
우리의 젊은 독자들의 감수성이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신 체제와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인생의 황금기인 20대를 보내야 했던 우리 세대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짧지 않는 기간 동안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독재 권력과 싸움을 벌였다. 압도적으로 강한 정치 권력과의 싸움에서
우리 세대는 민중의 힘과 역사의 진보를 믿고 의지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도서관이 아니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역사를 배운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우리에게 단순한 관찰과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기도 했다. 나는 역사가 우리가 함께 짊어지고 가는 삶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역사를 바로 이해하는 데
반드시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이야기한 것도 '객관적인 진리' 가
아니다. 독자들은 모든 역사책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하듯 이 책 역시 비판적인 눈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평소에 지니고 있던 역사에 대한 여러 의문에 대해 예전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더 깊이 역사를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에게는 책의 말미에 적어 둔 참고 목록이 도움이 될것이다.
1994년 1월 유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