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는 정치적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중도의 입장에 있음으로써 좌파로도 우파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 당파 초월성. 균형. 중용
심사숙고. 이성. 이념 초월 등과 같은 의미라고 받아들여진다.
중도를 추구하는 것이 대중을 얻는 길이라고 여겨진다.
중도의 자리에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사실 ‘중도’라는 개념은 불명확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가로>의 독일 특파원인 ‘장 폴 피카페’는 “중도적인 삶은 부드럽다”고 쓴 적이 있다.
“중도라고 불리는 사회의 부드러운 배보다 더 자연스럽고 , 이해할 수 있고,
악의 없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편안하고 화해적인 느낌을 준다.“
중도란 무엇이 극단적이라고 정의되고, 무엇이 우파나 좌파라고 정의되는지에 따라
계속해서 바뀌는 입장을 말한다.
중도에 서는 것은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피카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도는 좌파도 우파도 없는 곳이다.
즉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중도란 그 속에 담을 내용을 기다리는 정치적 기능이다.“
그곳은 “정치적 참여가 짐이 되는” 열정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중도란 결정할 수 없거나 결정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는 특히 많은 성형단어와 고무줄 개념을 만들어낸다.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너무 편파적이고 임의적일 경우 또는 그 둘 모두가 사회적으로
정당하며 둘 사이에 일시적인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경우, 즉 단순히 흑백으로
나눌 수 없는 경우에는 그러한 입장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택하거나 입장 차이를
중재하는 것이 합당하며 건설적일 수 있다.
항상 합의할 줄만 아는 사람은 대립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
그런 사람은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적 능력도 없다.
정치적으로 영원히 중도적 길을 걷는 사람은 개성 없는 정치가인 것이다.
대립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도를 벗어나야 한다.
그것을 원칙적으로 피하는 사람은 정치가가 아니라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다.
사민당 정치인인 헤르베르트 베너는 꼭 필요한 경우에는 과격할 정도로 핵심을 찌르는
명수인데, 그는 정당회의에서 사민당이 받아들이기 힘든 협상을 하려고 시도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은 지금 똥으로 초컬릿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색깔은 비슷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본래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유권자들은 중도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선거에서 ‘중도’적인 정치인을 선호하면서 그들에게 특성이 없다는 점을 무시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우유부단함과 조화 욕구를 ‘중개자’에게 투영해 보며 동시에
방향을 제시해주기를 갈망한다.
유권자들은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지만 분명한 입장을 드러내는 사람을 무너뜨린다.
무엇이 좌파이고 우파인지 비교적 분명하던 때에는 정치적 중도를 정의하는 것이 수월했다.
그러나 좌파와 우파의 내용이 불분명해지고 서로 중도의 자리를 향해 모여들고 있으므로
중도의 개념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좌파가 중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파는 남아 있다면 중도는 좌파가 되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중도는 오늘은 절대적이다가 내일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 수 있다.
이탈리아 철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우파와 좌파>라는 책에서 어떤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정치적으로 항상 두 가지 기본 방향 사이의 긴장관계가
있어왔다고 말했다.
즉 평등을 추구하는 방향과 이기심을 추구하는 방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동물’과 ‘개인적 동물’ 즉 사회와 개인, 공익과 개인 사이의
영원한 긴장관계로서 보편적인 혹은 개인적인 생활조건에 따라 다양한 특성과
경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극좌로 갔다가 우파로 돌아오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설명 가능한 정치적 입장은 모두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더 이상 중립적일 수 없다.
그러한 입장을 내세우는 것은 곧 대립을 의미하며 항상 중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