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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 이 맛이 신파다! (인정옥)
돌멩이 | 2008-02-19 12:18:26 | 조회 396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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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英雄本色, 1985년감독 오우삼출연 적룡, 장국영, 주윤발

 

<영웅본색>을 이야기하자. 감독 오우삼, 출연 적룡, 장국영, 주윤발. 제목 알고, 감독 알고, 배우 알면 이야기 끝났다. 적룡을 몰라도 어떤 영환지 알기엔 지장없다. 그 흔한 신파 조폭물이다. 착한 깡패인 형은 예쁜 동생을 성심껏 키워준다. 예쁜 동생은 경찰이 된다. 근데 예쁜 동생은 형이 깡패란 사실을 알게 되고 형을 미워한다. 그러다가 형의 깡패친구를 통해서 형이 착한 깡패란 사실을 알고 형을 껴안고 엉엉 운다. 깡패친구는 나쁜 깡패한테 죽던가 근데 2편에서 다시 살아나던가 어쨌건 주윤발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주윤발이 절름발이가 되기도 했는데 그게 1편인지, 2편인지 도통 내 기억이 모자란다. 제대로 기억도 못해내는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에 써대는 나는 참 한심하다. 그럼 예전 영화공부 열심히 하던 때, 그 훌륭한 영화들은 제대로 기억해내나 못한다. 뭐 그럼, 그게 그거다. 이 영화의 주제는 허접하다. 되도 않는 형제애와 의리, 뭐 이런 거다. 아무리 홍콩누아르니 어쩌니 말 붙이기를 한다 해도 주제가 허접하다는 사실을 속일 순 없다. <영웅본색>의 기억 속 키워드는 딱 세개다. ‘영웅본색’이란 제목, 쌍권총, 절름발이. 주윤발의 쌍권총. 무작정 뛰어서 무작정 갈겨대는데 적들이 무작정 죽는다. 게다가 주윤발의 몸이 적들의 총알세례로 걸레가 되는데도 안 죽는다. 할 짓 다하고 할말 다하고 죽는다. 처음엔 어이없어서 입 벌어지다가 나중엔 감탄사 뱉느라 입 벌어진다. 어떤 합리적 사고도 리얼리티도 끼여들 틈이 없다. 중국인들의 뻥은 세상을 지배한다. 또 하나 주윤발이 끌고 다니는 그 절름발. 그 절름발 안엔 철기둥이 들어 있었나 아니면 콘크리트였을까 끌리는 절름발이 바닥을 훑는 소리는 너무나 무거웠다. 그 무게를 끌면서 배신한 옛 부하의 차를 닦으며 비굴한 웃음을 흘리는 주윤발의 신파가 재미났다. 아니다, 슬펐다. 이 맛이 신파다.

 

극장 안에서 입 벌리고 영화보고 나와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길을 걷다가 난 일종의 사색을 했다. <영웅본색>이 내 안에 총질을 했다. 알았다. 내 안의 경건함과 엄숙함을 박살내고 신파를 끌어당겼다. 참 시원하다. …영화는 신성한 그 무엇이 아니다. 80년대 중반에 이 영화를 봤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살던 그땐 영화든 세상이든 무지 심각하고 리얼했다. 마땅히 그래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회든 개인이든 가벼워서는 안 되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그 심각한 세상의 껍질을 핥아 먹으며 엄숙주의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나보다. 그런데… 그 심각함의 겉만 핥아대느라 그 안의 진지함을 맛볼 새가 없게 되었다. 진지함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심각함이 마음 안의 진지함을 억누르면 그게 엄숙주의다. 어렵나 엄숙주의는 엄살주의가 되기 십상이다. …세상을 가볍게 보고 진지하게 즐겨라.

 

몇달 전 <씨네21> 백은하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잠시 심각하다는 것과 진지하다는 건 다르다는 말을 했다. 대본을 만들며 머리 속이 이리저리 오락가락할 때도 진지와 심각의 경계를 그어대는 일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난 심각하고 엄숙하고 고결하고 경건한 사람이 싫다. 제 안에서 진지하고 그래서 몸이 가벼운 사람이 좋다. 아마도 <영웅본색>을 보던 날 그랬나보다. 영화를, 좀더 가서 사물을, 좀더 가서 세상을 가볍게 보고 내 맘대로 깊이 느끼는 버릇이 들기 시작했나보다. <영웅본색>의 영웅은 세상을 구한 영웅이 아니다. <영웅본색>의 영웅은 세상의 씁쓸함을 끌어안고 걸어가는 자들이다. 그래서 좋다. 난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참 부담스럽다. 그런데 그 씁쓸한 세상을 끌며 살아남은 노란색 영웅들을 봤다. <영웅본색>은 뻥이 아니었다. 지난해 대선에서 총알세례로 걸레가 되어서도 살아남은 한국형 주윤발을 봤다. 사실 홍콩 주윤발보다는 좀 못생겼다. 하지만 주제의식은 홍콩판보다 훌륭하다. 재미나고 슬펐다가 다시 재미난 ‘영웅본색 2002’였다. 그의 쌍권총이 회를 거듭할수록 더 멋지게 쓰여졌으면 좋겠다. (Cine21 no. 385)


- 인정옥/ 시나리오·드라마 작가 <여고괴담> <네 멋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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