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원을 총명하고 성실한 학자에서 시대의 고뇌를 헤쳐나가는 비평가로 거듭나게 한 사건, 그 사건을 소개해 드리면서 여러분을 노혜경의 캣츠아이 오늘 오후 세시로 초대합니다.
2000년 말지 12월호의 기사입니다.
************************************************************************
세 가지 파장, 한 가지 희망
보도 그후 - 일파만파로 번진 이명원의 김윤식 비판
일파만파. 이 말만큼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 같다. 본지가 지난 2개월에 걸쳐 연속 보도한 두 개의 기사가 일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간략하게 그 사건의 경과를 정리한다.
--------------------------------------------------------------------------------
본지는 10월호에 문학평론가 이명원씨(당시 서울시립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중)가 석사과정 당시 작성한 논문을 인용해 「특종―김윤식 서울대 교수, 일본 평론가 저술 표절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런데 논문 작성자인 이씨는 그후 심한 홍역을 치러야 했다. 본지 기사와 관련해 모교의 한기 교수(김윤식 교수의 제자) 등에게 학문적 억압과 모욕을 받은 것이다. 이씨의 양심선언에 따르면, 사실 그러한 억압과 모욕은 3년 전 문제의 논문을 발표할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인내의 한계를 느낀 이씨는 본지 11월호에 그 사건의 전말과 자신의 소회를 적은,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라는 제목의 고백적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을 발표한 직후 대학원에 자퇴서를 냈다.
이 사건의 전말과 이씨의 고백이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소개되면서 네티즌의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씨와 비슷한 억압을 당하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던 젊은 지식인들의 울분 섞인 고백과 규탄도 잇따랐다. 그것은 마치 부글부글 끓고 있던 용암이 작은 틈이 생기자 두터운 지층을 뚫고 지상으로 분출한 것과 같았다. 인터넷 여론에 놀란 제도언론도 이 사건을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었다. 『시사저널』, 『뉴스메이커』, 『뉴스피플』 등 주간지가 이 사건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했으며, 『한겨레』와 『문화일보』 등 일간지는 사설에서까지 이 문제를 언급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메이저 신문은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다는 점이다.
서울시립대 학생들 문제 교수 퇴진 결의
지식인들의 발언도 시작됐다. 권성우, 홍세화, 김명인, 노혜경, 김동원씨 등 문학계 인사들이 자신의 홈페이지나 신문칼럼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들은 주로 전근대적인 교수-제자의 주종관계와 학문적 억압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문학계에서도 역시 주류 쪽에 몸담고 있는 인사들은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했다. 대학가에서도 이 사건은 단연 최고의 화제가 됐다. 많은 대학의 국문과 홈페이지 게시판에 본지 기사가 소개됐으며, 이명원씨가 몸담고 있던 서울시립대 국문과와 김윤식 교수가 있는 서울대 국문과 홈페이지는 네티즌의 집중 방문 대상이 됐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이 사건을 둘러싼 논쟁의 불씨가 아직도 꺼지지 않은 상태다. 특히 창비 게시판은 거의 두 달 가까이 이 문제와 관련된 의견으로 도배되다시피 하면서 '학술토론장'의 역할을 대신 하고 있다.
한편 서울시립대 국문학과의 동향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현재 졸업생과 재학생이 참여하는 공동대책위가 구성된 상태이며, 재학생도 별도의 대책위를 발족시켰다. 특히 재학생 대책위는 지난 11월 2일 비상총회를 열고 표결을 통해 한기 교수의 퇴진을 결의했다.
이른바 '이명원 사건'은 지식인 사회에 몇 가지 고민과 과제를 던져 주었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태원씨는 본지에 보낸 이메일에서 이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1)표절과 지적 정직성 문제 (2)대학원 도제식 시스템 문제 (3)서울대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그의 발언 요지를 소개해 고민의 화두로 삼고자 한다.
(1)표절과 지적 정직성의 문제: "이번 상황을 표절이라는 법적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지적/학문적 정직성'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 만약 어디에서 그런 정보를 얻었다거나, 누구의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알고서도'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히 '지적인 차원의 부정직성 또는 불성실의 증거'라고 믿는다. 만약 김윤식이 그러한 지적 정직성의 기본을 무시했다면 적절한 비난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김윤식이 유형무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일본 학계의 성취에 대한 자의식과 그 굴종의 함수관계를 밝히는 것과 같은 다각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2)대학원 도제식 시스템 문제: "한국 대학의 도제식 시스템에서 스승이나 학계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이미 금기를 넘어 자살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기 교수(이명원의 지도교수-기자주) 등이 이명원에게 비이성적 행태를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명원의 글은 김윤식이라는 한 학자에 대한 다른 학자의 비판이 아니라, 도제식 피라미드의 맨 밑에 있는 일개 대학원생이 최상에 존재하는 제왕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제식 시스템에 대한 극복의 차원에서 문제제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3) 서울대 문제: "한기의 '조폭적 행태'에서 보여지듯, 서울대 문제가 우리 사회에 아주 다양하고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비단 서울대나 서울대 출신 교수로 가득 찬 학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문제는 한국의 대부분의 대학에서 약간은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서울대 문제로까지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감정적 격분 차원에만 머물면 안 된다. 서울대 개혁이나 교육제도 개선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더욱 세련된 논리가 요구된다."
이 사건이 앞에서 열거된 지식계와 인문학의 구각을 성찰하고 전망을 찾는 여정의 소중한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는 월간 『말』은 상황 전개에 지속적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두 인문학자의 논쟁적 글을 싣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이명원에게 사죄한다
노혜경 (시인, 부산대강사)
----"네가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 않으면 네가 문제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 --스캇 펙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재인용
한국문학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금년들어 한국 문단에는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다. 대충 꼽아보아도 권성우--권오룡의 문단권력 논쟁, 미당 서정주의 친일, 어용 행각 재론, 시인 박남철의 여성시인 폭행사건, 동인문학상 파문 등 다방면에서 문학하는 인간과 행위의 본질에 대해 전면적인 고민을 촉발하는 일들이 연어어 벌어지고 있다.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새삼 돌아보게 만드는 전기한 사건들 말고도, 비평가 이명원이 최근 펴낸 저서에서 김윤식 교수의 표절행위를 지적한 일은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신경숙의 표절 시비와 쌍벽을 이루며 한국문학판 전체를 강타한 사건이다. 이로써 지금 우리는 문학이란 과연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오늘의 문예비평] 가을호에서 문학권력논쟁의 여러 변이형으로 요약되는 앞의 사건들을 가리켜 문학의 지형도가 변화하고 있는 조짐이라고 분석한 일이 있다. 말지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거론된 사건들은 하나같이 문학을 통해 일정한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야기하는 문제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문학을 생산하는 측과 수용하는 측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담론형성역할이 평준화되고 있는 인터넷 세상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라 할 수도 있다. 이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은, 실제권력자들의 침묵과 비판하는 사람들의 당당함이 선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이다. 어쩌면 한국문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담론의 힘만으로 제도에 함몰된 문학을 구해낼지도 모른다는 즐거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권성우, 김정란, 이명원, 정문순 같은 비평가들의 이름을 기꺼이 기억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갑자기 소위 이명원 사태라 명명된 지독하게 퇴행적인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한 소장학자의 논문이 학계의 최고 권위자의 치명적 상처를 건드렸고, 그로 인해 전문가 집단에서 축출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문학을 한다는 가장 기초적인 인문적 즐거움은 이로써 추문이 되고 말았다. 아니, 아직은 추문이 되기 일보직전일지도 모른다. 이 사건을 둘러싼 저간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몇십년 뒤 지독한 몰골로 다시 햇볕 아래 설 수밖에 없는 썩은 라자로의 시체가 다행히 아직 무덤에 은폐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의 개요는 의외로 간단하다. 비평가이자 소장국문학자 이명원은 박사과정의 공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선배 학자인 김윤식 교수(이하 존칭 생략)가 일본학자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표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왜 그런 일이 있었던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는 김윤식이 임화라고 하는 선배학자를 겨냥하여 학적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임화를 극복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동화되어 버렸음을 발견했고, 그 이유를 추궁해본 끝에 김윤식에게는 그 스스로 '생리적 감각'이라 부르는 무의식적인 일본에의 향수가 있어 그러한 '생리적' 지향이 그로 하여금 일본학자를 도용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후학이 선배의 업적을 비판하고 심지어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학문의 발전, 더구나 문학의 발전은 아버지를 배워 익히는 것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아버지를 비판하고 심지어 '살해'함으로써 이루어져 온 것임을 몰랐단 말인가?
그런데 뜻밖에도, 학문연구의 현장에서 반박되거나 토론되어야 할 이러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명원은 자기가 발판으로 삼았던 학문의 전당에서 제발로 걸어나와야 하는 엄청난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사건은 갑자기 학맥과 인맥으로 교묘히 얽힌 사계의 부패 커넥션을 드러내는 표지처럼 되어버렸다. 문제적 상황을 지적한 바로 그 사람을 문제시해 버리는 습성--이명원식으로 말하면 금기를 건드린 자가 바로 금기가 되는 현상--은 오랜 식민통치와 군부독재의 잔재에 다름아니며, 비판자의 입을 뭉개고 혀를 타들어가도록 만드는 가장 지독한 형벌이자, 비판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비판자와 다수 국민을 갈라놓는 교묘한 통치전략의 답습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말해야 할 사람들이 지금처럼 침묵한다면, 아마도 국문학 연구는, 그리고 튼튼한 아카데미즘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야 할 한국문학의 미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나는 저 위 인용문에서 언급한 대로, 국문학을 공부하는 학도의 한 사람으로써 이 문제에 내가 적극적으로 발언하지 않으려 한다면 나 자신이 필연코 같은 문제를 증폭시키는 사람이 되리라는 두려움으로 이 글을 쓴다.
김윤식은 정말 표절하였나?
엄밀히 말해 이번 사태에서 이명원의 글이 제대로 된 비판이든 아니든 그것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잘못된 비판이라면 학술적 논쟁으로 이미 지양되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가 걷잡을 수없이 발전한 것은, 이명원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점 못지않게, 사실을 덮기 위한 노력이 외적 강제의 형태를 띠었다는 점일 것이다. 문제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학적 토론을 통해 이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이미 저질러진 잘못들이 너무 크다.
그러나 지금 이 문제 앞에서 "이명원 씨가 대학원을 나온 건 참으로 그다운 현명한 선택인 것 같다. 요컨대 그에게는 아카데미즘보다는 저널리즘이더 어울리는 것 같다. 대학원을 박차고 나올 때 이미 그에게 '손익분기점'에 대한 '대차대조표'가 서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보는 건 나의 지나친 호기일까. 좌우간 그는 당분간 먹고 살 일을 걱정 안해도 될 게다. 이름도 적당히 알려졌겠다 인터뷰 요청과 원고 청탁이 쇄도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까. 그런 점에서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는 아카데미즘을 박차고 나온 건, 그를 위해서나 아카데미즘을 위해서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서울대 국문과 자유게시판 국문인 아이디의 글)라는 지독한 말까지 등장하는 현실이고 보면, 이명원의 논문이 제대로 된 학적 검토의 대상이 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나는 이미 [대한매일] 칼럼에서 "이명원에게 가해지는 다른 아들들의 지적 테러를 아버지 스스로가 막아야 한다. 요셉으로부터 다음 세대를 위한 가능성을 바라본 야곱처럼, 이명원으로 하여금 아버지 살해의 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할 학적 자유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라는 말로 이 문제에 김윤식 교수가 직접 나서서 해명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단 한 차례 "실수"라는 말로 표절사실을 시인한 것빼고는 김윤식 교수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으며, 서울대와 창비 등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표절에 대한 상식 이하의 옹호가 난무할 뿐이다.
따라서, 이명원의 억울함을 밝혀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번 사태에 대한 다양한 반응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과연 이명원의 논문이 학적으로 부당한 것이었던가를 살펴보고, 이명원이 지적한 표절사실이 얼마나 타당한가를 따져보기로 하자. (물론 이 지면에서 그러한 작업을 정교하게 수행할 수는 없다. 또한 나는 그러한 작업을 행해야 할 일차적 책임은 바로 김윤식 교수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원의 논문의 핵심은, 임화에 대한 타자의식을 자기 학문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김윤식이 소위 [현해탄 컴플렉스]로 스스로 명명했던 임화의 일본경사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침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써 가라타니 고진을 표절한 사실을 이명원은 지적하고 있다. 이명원의 논문을 통해 이 점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임화는 일제치하에 전개되었던 우리 신문학을 서구문학이 이식된 역사라고 보았고, 따라서 우리 신문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외국문학을 연구하면 된다고 하는 이른바 이식문학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때의 외국문학이란 당연히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문학 또는 일본 근대문학 그 자체이다. 김윤식은 임화의 이러한 태도를 바로 저 [현해탄 컴플렉스]라는 말로 명명하고, 일제하의 우리문학 연구에서 현해탄 컴플렉스를 반드시 극복해야 할 태도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명원에 의하면, 80년대 이후 김윤식의 행보는 오히려 그 자신이 현해탄 컴플렉스에 빠진 모습, "타자에의 동화"라는 말로 규정될 "자가당착"적 양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이명원, 타는 혀 253쪽부터 256쪽까지 내가 임의로 요약함)
이명원의 글에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있다면, 김윤식의 "그러한 자가당착이 일본의 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의 기계적인 표절이라는 행위에 의해 나타나게 되었다"(위의 책 255쪽)라는 대목이다.
이 대목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를 품고 있다. 하나는, 김윤식의 표절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표절 사실이 어째서 [현해탄 컴플렉스]에 빠진 것으로 판단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우선 표절만을 두고 말해보자면, 이명원의 글에 나타난 사실만으로도 엄연하다. 김윤식 스스로도 '실수'였다고 시인하고 있거니와, 그것이 단순히 '실수'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일은 김윤식의 표절이 [현해탄 컴플렉스]였던가를 따져보는 일에 대단히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나는 이 부분을 눈여겨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명원이 제시한 자료는 분명 명백한 표절이지만, '실수'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는 단순히 각주 다는 것을 잊은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미 나 자신이 그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국문학도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문제의 가라타니 고진도, 문제의 [한국근대소설사 연구]도 이제야 비로소 읽어보았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세 권의 책을 나름으로 꼼꼼히 읽고난 나의 결론은 김윤식의 표절행위는 단순히 몇 페이지의 문장을 베껴 쓰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90년대 초반에 박일문과 이인화의 소설을 두고 장정일이 [베끼기의 세 가지 층위]를 말하면서 규정한 대로 세계관의 표절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 [현해탄 컴플렉스]라 명명한 것은 오히려 이명원의 한국문학 연구자 김윤식에 대한 애정이라고까지 생각된다.
내가 열심히 문제의 저작들을 읽고 있는 사이에 창작과비평 게시판에는 <창비무명씨>라는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이 김윤식의 [한국근대소설사연구]가 가라타니 고진을 어떻게 표절했는지를 상세히 밝힌 글이 올라왔다. 11월 10일자로 2회에 걸쳐 올린 이 글에서 <창비무명씨>는 김윤식의 표절행위가 단순한 실수가 아님을 조목조목 밝혀 비판했으며, 나는 그가 제시한 자료를 실제로 찾아본 결과 모든 것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삼스럽게 내가 다시 자료를 뒤적일 필요가 없을 정도의 세밀한 분석이어서, 이 분의 글을 일부 인용하고자 한다.
<창비무명씨>는 "김교수의 표절은 단순한 "실수"로 간주하기에는 그 양상과 범위가 너무도 심각하다"고 주장하면서 무려 일곱 군데의 표절 사실을 지적하고 있으며, 나아가 "김교수가 인용법을 제대로 모르는 학자여서 <실수>했다고 보기에는, 다른 책에 대한 각주달기가 지나치게 세밀하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지적하고 있다. 이명원이 지적한 바 있는 문제의 [한국근대소설사연구] 53페이지 이하에서 김윤식은 "고진이 인용한 인용문과 본문을 그대로 번역해 편집하고 있다. 그는 본문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음은 물론이고, 단 한문장에 붙인 각주에서 조차 페이지 숫자를 명시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고진이 인용한 이토세이와 레비-스트로스의 책에 대해선 고진이 언급하지 않은 쪽수까지 자세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 <창비무명씨>의 지적이다. 쉽게 말해서 고진의 책에서 인용된 문장을 그대로 옮겨오고서 고진보다 더 자세한 각주를 달아 스스로 책을 세 권 참조해서 인용한 것처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창비 게시판에서 확인하시기 바란다. 다만, 방금 인용한 부분에서 김윤식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시 <창비무명씨>의 말을 인용하자면, "인용문과 본문은 고진의 책을 그대로 베낀 것인데, 김교수는 고진이 작가명과 책명만을 밝힌 이토 세이의 <일본문단사1>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의 인용문에 대해선 치밀하게 각주에 쪽수 표시까지 하면서 출처를 밝히고 있다. 김교수가 다른 책에 대해선 완벽한 각주 달기를 하면서, <맨 얼굴>, <풍경>, <가면>등과 같은 주요 어휘와 방법론을 빌려다 쓰고 장장 여러 페이지에 걸쳐 비정상적일 정도로 길게 인용한 고진의 책에 대해선 본문에서 작가의 이름조차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진의 글의 단지 한 문장에만 각주를 달면서 그나마 다른 책과는 달리 페이지 숫자를 명시하지 않은 것을 단순한 <실수>로 묵인할 수 있을까?"
이명원은 이러한 표절이 일어나게 된 근본원인을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을 내면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김윤식세대의 심리적 문제에서 찾고 있다. 표절은 잘못이지만, 그러한 표절이 자행된 이유를 무의식의 층위에서 발견해줌으로써 이른바 [현해탄 컴플렉스]를 결코 극복할 수 없었던 선배 세대의 역사를 그 자체로 일정 부분 긍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그 자체에 대한 소위 "생리적 감각"의 지향은 표절에 대한 무감각을 불러왔으며, 이는 김윤식의 치명적인 수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서구 학자들인 르네 지라르나 레온 에델 등을 인용한 경우와는 달리, 김윤식에게 고진은 방법적 차용의 대상이 아니라 전면적이고 기계적인 받아쓰기용 정전이었으며, 바로 이 점이 이명원에 의해 통렬하게 비판당한 [현해탄 컴플렉스]의 정체인 것이다.
이 논문 전체를 통틀어 이명원은 "근대란 가치중립적인 제도적 장치에 불과"하며 따라서 "물질적 차원에서의 검토"만으로도 근대를 파악하는 데 별다른 무리를 발견하지 못하는(타는 혀 276쪽 참조) 김윤식과는 달리 근대성이란 근대를 살아내는 의식적인 담론적 실천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혀를 묶을 수는 없다
자, 사건이 이렇다면, 이명원의 말처럼, "학자적 엄격성과 진실추구의 견결함을 지켜야 될 위치에 있는 그가 일본문학비평가의 저작을 표절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저술인 양 글을 쓰고 책으로 묶어냈다는 사실은 어떤 이유로도 용인될 수 없는 문제"가 맞다. 나아가, "기이한 것은 일본문학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았을 일문학자들이나 한국의 국문학자들은, 왜 단 한 번도 문제를 제기하고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그의 물음에 이제 김윤식의 제자들이 답해야 할 차례이다.
그러나 현실은 알다시피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서울대 국문학과 게시판에 등장한 글들은, 이 사건이 서울대 공화국의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만을 초래하고 있으며, 어이없을 정도로 침묵을 지키는 국내 언론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상의 토론방들이 이 문제를 두고 연일 뜨거운 공방을 벌여온 것과 너무나 대조적인 제도 언론의 침묵이다.
그러나 나를 가장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김윤식 교수 자신의 침묵이다. 내가 기억하는 김윤식 교수는, 대단히 미덕이 많은 사람이다. 거의 모든 발표되는 소설을 챙겨 읽는 사람이고, 잊혀지고 외면당하기 쉬운 실험적 작가들의 손을 들어준 사람이며, 카프를 위시한 월북 납북 작가들의 자료를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챙기고 보존한 사람이다. 바로 그 업적만으로도 김윤식의 한국문학사에의 기여는 결코 폄하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처해 있는 이러한 곤경은, 바로 그 자신에 의해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김윤식 교수는 바로 자기 아들들에 의해 저질러진 이명원에 대한 모욕과 비난을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 근대적 의미의 사제관계란 중세의 도제와 마이스터의 사이나 가부장적 적자 승계의 관계가 아니라 토론과 비판을 통해 스승을 극복해야만 하는 관계라는 것을, 그 자신 [현해탄 컴플렉스]에 침윤됨으로써 왜곡시켜버린 크나큰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근대성을 문제삼는 학자들이라면, 비판에 대해 왕따로 대응하는 일이 얼마나 전근대적이며 동시에 반근대적인가를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스캇 펙의 말마따나 문제에 직면하려 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 그 자신이 문제가 되어버리게 마련이다. 지금 당장의 침묵이 아버지와 착한 아들들에게 안락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불타오르기 시작한 혀들을 오래 묶어둘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내가 이명원에게 사죄하는 까닭
고백컨대, 나는 처음에 인터넷상에서 저 사건을 접했을 때만 해도 이명원이 지적한 표절혐의가 김윤식 자신의 말처럼 '실수'의 차원이며, 그 점을 인정한 것만으로도 과연 대가답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문제의 저작 세 권을 읽고 난 심정은, 한 마디로 말해 나 자신의 공부 안 한 죄를 통탄할 따름이다. 내가 진작 저 저작들을 읽었다면 나는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 단적으로 말해, 먼저 공부했어야 할 사람들이 하지 않았던 대가를 이명원이 대신 치르는 것에 불과한 사건이다. 이러한 직무유기가 문단에 미친 해악을 이 젊은 비평가가 그야말로 쓰레기처리반--<창비무명씨>의 신랄한 표현에 의하면 시체지기--처럼 묵묵히 감수하게 내버려둔다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이 지면을 빌어 사죄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다.
위에서 김윤식 표절문제를 자세히 밝혀주었던 <창비무명씨>는, 같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김교수의 표절에 대해 상세히 밝히는 이유는, 지금 일고 있는 찻잔 속의 폭풍이 지나면 희생양으로 남는 자는 이명원일 것 같고, 그가 학문적 패기와 열정으로 제기한 문제에 대해 김교수는 침묵하고 있고, 그의 제자들은 너무도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생산적인 방식으로 이 사태가 정리된다면, 우리 인문학은 소생할 가망성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지난 몇 년 간 인문학의 위기 내지 소멸을 걱정해 왔지만, 인문학의 상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인문학의 침체의 주요 원인을 대다수의 학자들은 외부에서 발견하고 있지만, 나는 이 상황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인문학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대학이 안고있는 주요 병폐는 다음 네가지로 압축해서 말할 수 있다. (1) 자유로운 토론문화의 부재 (2) 학문의 근친상간 (3) 밥그릇 싸움 (4) 가부장적 위계질서. 이 네 가지 병폐가 선생과 학생의 뼈아픈 자기성찰을 통해 타파되지 않는다면, 이 땅의 인문학의 미래는 암담할 따름이며, 결국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역설적으로 이명원 사태에서 한국문학의 희망을 본다. 비록 거꾸로 간 사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착한 아들이 되기를 거부하는 아들이 있다는 것은, 한국문학에도 위에 든 네 가지 병폐로부터 벗어난 자리가 발생하고 있다는 조짐이 아닌가? 이명원이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새로운 담론을 발생시키려 애쓰는 비평가라는 점에서 이러한 희망은 결코 한낱 몽상은 아닐 것이다.
과연 이명원은 [비평과 전망] 잡지의 창간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90년대의 문학비평은 이제 '비난의 수사학'을 넘어서 '비판의 해석학'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때 비판의 해석학은 타자를 향한 비판의 시선이 냉철한 자기비판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의 문학적 사태를 거리를 두고 관망하기 보다는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비평적 태도를 의미한다. [...]비판의 해석학을 견지하기 위해, 우리는 문학장의 내부에서 관행화된 불합리와 도그마적 해석경향과 싸워야 하며, 문학장의 외부에서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비판적 행위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이 모든 논의들이 한 줄기로 흘러 대안적인 문학적 이념의 기획이라는 문제로 집결된다. 그렇다! 이제 새로운 문학적 이념 기획에 뛰어들 때이다."
그렇다! 한국문학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은, 얼핏 보기에 관련이 없어보일지는 모르나 모든 일이 바로 "새로운 문학적 이념의 기획"이라는 방향을 놀랍도록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하필이면 표절의 문제라는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신비로울 정도이다. 묶인 혀를 풀어내어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 바로 한국문학의 머리위를 떠도는 표절의 유령을 물리치는 일이 될 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