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빠라 말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지지하던 국회의원 후보가 낙마했다고 해서 그 지역과 국민에 욕지거리를 해댄다면 난 노빠라 말할 수 없다. 욕까지야 분한 마음에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생각까지도 지속적으로 그렇다면 난 감히 노빠라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국민만 믿고 지금까지 묵묵히 걸어 온 노무현과 달리 국민을 탓하고 무지하다 한탄한다면 난 노무현과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빠라 말 할 수 있는가?
거기가 회사가 됐든 가정이 됐든 여전히 수직구조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협의가 아닌 명령, 소통이 아닌 관리에 별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난 노빠라고 감히 말 할 수 없다. 아내에겐 설겆이와 빨래보다 친구들과의 밤 늦은 수다에 열중일 때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고 부하 직원의 설익은 아이디어를 세상을 바꿀 대작프로젝트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노빠인가?
여전히 일회용 종이컵을 사용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고 자동차와 환경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당장 닥친 일 아니라며 미뤄두고 이스라엘에 전비(戰費)를 갖다 바치는 스타벅스를 즐겨 찾는다면 난 노빠가 아니다. 노무현이 성을 내는 상황은 한국, 왜 이런가가 아니라 상황이 민중에게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고 그게 누구든 언제든 왜이든 불합리와 아전인수의 정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고 적어도 공동체 안에서 사는 사람은 그 공동체와 개개의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노빠인가?
단언컨데 향기가 나는 사람이다. 봉하마을을 찾는 사람들을 보자. 거기엘 가려는 이유는 수십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길 찾은 사람들의 표정이 담긴 사진을 보면 거기엔 향내가 난다. 노무현대통령의 말처럼 '차'도 한 잔, '밥'도 한끼 대접을 못하는데도 대통령의 동작 하나, 언변 하나에 발그레 웃는다. 향기를 지닌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 향기가 전이된 것이다. 이는 갓난아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기와 마찬가지로 선해지는 현상과 같은 것 아닐까.
노무현은 그 누구 때문이거나 그 누구 덕분에 어부지리로 무언가를 얻은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가 해 내었고 스스로 존재했다. 그의 젊은 시절을 바라봤던 국민은 그가 쏟아내던 울분과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투영했고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아마도 그동안 핍박 받았던 자신의 처지에 대해 보상해주리라 믿었을 것이다.
노무현에 표를 던져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무현이 조중동을 갈아 엎기를 바랐을 것이다. 노무현이 재벌족벌들의 카르텔 사슬을 단칼에 베어내 버려 줄 것을 바랐을 것이다. 검찰과 법무부를 손아귀에 넣고 그들이 서민의 눈치를 보게 하길 원하였고 그게 심하다면 적어도 법적용에 형평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길 바랐을 것이다. 한마디로 개혁쪽의 박정희를 원했던 것이다.
노빠라면, 누가 나를 대신해 주길 원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사람일게다.
노빠라면, 내가 존중받고 싶은 만큼 남을 존중하는 사람일 것이다.
노빠라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을 듬뿍 담은 사람일 것이다.
노빠라면, 그가 노무현을 만났을 때 거기에 노무현과 또 다른 노무현의 악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노빠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