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 톨스토이가 말한 교회 비판입니다. 교회 이외에도 문명사회에 대한 다양한 풍자와 비판이 있었지만 교회 비판 만 소개한 데는 시민광장을 비롯해 일종의 팬클럽의 형태로 모인 사회가 종교 집단하고 아주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임의 중심에 한 명의 탁월한 인물이 있고, 그를 따르는데 있어 순수하고 우직하고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비판적 지지자의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 반대하다가 더 열심히 따르는 사람, 잘 믿다가 실망하고 떠나는 사람, 늘 불평을 터뜨리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따라다니는 사람, 믿음의 대상을 잘 포장해서 가치를 더 높여주는 사람, 스승의 의도와 처지를 재빠르게 파악하여 남 모르는 고민을 앞서서 해결해 주는 사람, 제 딴에는 잘 한다고 하지만 늘 실수를 해서 스승에게 수시로 해결과제를 떠 안기는 사람, 마침내 등에 칼을 꽂는 배신자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있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굳이 신을 섬기는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므로 (유교를 보면 알다시피) 뛰어난 사상가나 정치적 인물을 중심으로 모인 단체에는 필연적으로 종교적인 속성이 포함되게 돼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속성 자체만을 가지고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문제는 결과죠.
한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청출어람을 실현하는 제자요 가장 악한 인간은 스승의 명성과 가르침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기꾼이요, 가장 지혜로운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과 가치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스승의 뜻을 실현하게 해 주는 사람이요, 가장 미련한 제자는 스승의 원수를 양산해서 오히려 스승의 입지를 좁아지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시민광장에서 유시민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애정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분명 참 아름답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굳이 종교적이거나 숭배의 대상이 아니더라도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 어떤 절대적인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라는 것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지혜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때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의 이단 논쟁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를 신으로 볼 것이냐 인간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는 아주 심각한 논쟁거리였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논쟁으로 이어지고 나중에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까지 얽혀 들면서 커다란 비극을 낳습니다. 이단으로 규정된 자들에 대한 핍박, 학살, 추방이 자행됐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단 사설의 굴레를 씌워 사람을 죽인 것이 기독교 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이단 논쟁에는 언제나 음흉한 정치적인 의도와 선동이 깔려있었지만, 그것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의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본인들은 절대적인 신앙 생활을 한다고 믿고 폭력을 휘둘렀으나, 그렇게 폭력적이 된 순간 자기가 그렇게 믿고 따르는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것은 몰랐던 그 무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무지는 일자무식의 못 배운 자들한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재적인 사상가나 정치가들의 미숙함(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그런 의미에서의 미숙함)이 더 큰 비극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모택동은 공산당 혁명을 위해 싸울 때가 그 인생의 절정기였습니다. 집권을 한 이후로는 그야말로 다양한 실망을 안겨주죠. 아무리 천재라도 당시로서는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이 어떤 비극을 가져올 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로라하는 천재들도 종종 함정에 빠지는 판에 우리 같은 범인들이 모인 집단에서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한다 한들 완벽한 계획이 나올 수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나 ‘시민광장의 정체성’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더더욱 그렇죠.
그러면 어차피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기도 힘든 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말고 그냥 넘어가야 할까요? 그도 아니라도 봅니다. 집단을 만들었는데 그 정체성이 모호해서 그 구성원 본인들 조차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면 그 또한 우스꽝스럽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를 먼저 확인하자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시오’라는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해야할까하는 방법을 의논하다가 서로 생각이 맞지 않아 사랑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마구 물고 뜯고 싸우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몰골입니까? 적어도 우리는 그런 희극 배우가 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논쟁은 치열하게 할 수 있어도 생각이 다르다고 모두 다 내 원수는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방법론이 달라서 결국은 각자의 길을 갈지언정 목표가 같으면 언제나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문국현을 지지했든, 이해찬을 지지했든 그들이 진정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소망해서 나름대로 선택했던 길이라면 언제고 다시 동지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야심을 채우기 위해 시민광장에 들어와 유시민을 지지한다고 설치고 뛰어다니면 언젠가는 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