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초인이 있었다. 그는 존재 만으로도 사람의 빛이 되었고 그의 존재로부터 뿜어져나오는 향기를 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한동안 세상을 초탈한 사람들 처럼 살았다.
어느날 초인이 생을 마감하게 됐다. 그가 떠나자 일부는 공동체를 떠났지만 남아있는 추종자들은 그들이 숭배해야 할 대상이 필요해졌다. 추종자들이 세운 사람은 초인의 아내였다. 그들은 그 여인을 공동체의 구심점으로 삼아 예전과 같은 삶을 살아가길 원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남편이 뿜어내던 향기가 없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너무 잘 알았다. 그녀는 추종자들에게 설명했다. "나는 남편이 아니고 남편이 될 수도 없다. 그러니 남편 때문에 이곳에 왔다면 돌아가라. 남편의 가르침 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결국 추종자들은 그녀를 숭배하기 위해 그녀를 감금해버렸다.
수구좌파(守舊左派)라는 말이 있다.
애초에 좌파라면 진보적 성향을 지닌 정치집단을 일컷는 말이었다. 진보의 내용은 사회를 재단하던 어떤 불합리를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일종의 동사형 명사다. 그러므로 진보의 재료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진보 그 자체는 영속할 수 있다. 그러나 "재료"는 구체적인 사안을 적시하기에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상당한 기간동안 해소되지 않는 사회적 불합리가 있을 경우 "재료"가 "진보"와 혼동되기 시작하고 종국엔 "재료"가 "진보"의 자리를 차지한다.
"자유"는 봉건의 잔재속에서 성장한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다.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보이지않는 손을 이야기했다지만 동시에 그 해악의 우려성을 적시하기도 했단다. 허나, 당시 경제적 자유를 목표로 하던 자본가계급은 스미스의 우려는 숨기고 자기에게 필요한 "자유"만 강조했다. 애덤스미스의 이름으로..... 그렇게 수 세기에 걸친 착취가 시작됐다.
경제적 자유의 패악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일화가 있다.
미국 북부의 사람이 남부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당신들 처럼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남부의 인사가 대답했다. "우리들의 노예는 당신들의 빈민 처럼 비참하게 살진 않습니다."
자유가 억압상태에서의 해방을 뜻한다면 자유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근대초기 경제적 자유가 자본가계급의 성장 - 빈민의 양산 - 부의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자유는 분리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자유는 1인 1표로 귀결되지만 경제적 자유는 1원 1표로 귀결된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는 갈등상태에 있을 수 밖에 없으며, 경제권력의 영향력이 정치권력을 넘어서기 시작할 때 정치적 자유를 억압한다. 그러므로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1인 1표의 정치가 1원 1표의 경제를 통제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과학"적으로 볼 때 내부모순을 극복하지 못해 자연 붕괴할 수 밖에 없다는데.... 두 말 하면 잔소리가 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경제시스템에 대한 관점만으로 정치적인 가름이 성립할 수 있다. 자본가 편이냐 아니면 노동자 편이냐로 갈려진다. 이런 시각이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다고 본다. 역사적인 희생의 광범위하고도 깊은 상처 때문에라도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래... 너는 누구 편이냐?"
수구좌파의 "자유" 알레르기는 이래서 생기는 것 아닐까?
하지만 세상은 변한다. 초기 자본가들이 스미스의 "자유"만을 편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이념 또한 편식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나는 "자유" 속에는 초기 자본가들도 몰랐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했던 사상가들도 간과했던 제3의 속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노동과 자본만이 가치창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가치가 잉여생산물 형태로 축적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가치창출이 기계의 투입 산출 처럼 도식화시켜서 보게 된 이면에는 투입되는 자원과 생산품이 획일적이란 가정이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획일적인 형태로 유지되지 않는다. 세상의 변화는 양적 변화와 구조적 질적 변화를 동시에 수반한다.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소득경쟁이 전부인 것 처럼 이야기한 가정은 애초에 틀렸다.
사람이 같은 밥을 먹고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각각의 특색이 달라지고 뇌의 뉴런구조와 성격이 달라지듯이 동일한 노동력과 동일한 자본을 투입해도 상황과 구조와 반응관계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산출물이 나올 수 있다.
생산과정은 상품의 산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지식의 축적, 역할관계에 따른 네트워크 형성, 상호작용에 따른 창발성이 부산물로 생겨난다. 따라서 가치란 상품에 특정하여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과정과 구조가 만들어내는 양태까지 포함하여 생각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얻어지는 이득이 "자유"의 부작용이랄 수 있는 불균형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사회자유주의"가 사상투쟁의 서곡이라면 이 부분에 대한 이념적 토대를 견고히 할 필요가 있다. 왜? 그들 좌파에겐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소위 "과학"적 이론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경제시스템에서의 "자유" 문제는 지난 50년간 충분히 결판난 거 아닌가 싶다. "자유"를 없애는 것은 실패했고, "자유"는 필요하지만 적절하게 견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도 되겠다. 이제는 "자유"의 부작용이랄 수 있는 불균형 문제를 "사회"적 장치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