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이면 출근을 한다. 아마도 차를 타고 얼마 쯤 가면 교통체증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얼마간 가면 회사에 다다른다. 또한 아마도 비슷한 시간대에 사람들이 출근할 것이고 회의를 하고 예정된 일거리를 처리할 것이다.
물론 차량은 시동이 안걸릴 수도 있고, 교통사고가 나서 내가 죽을 수도 있으며, 회사에는 출근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또한 직원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사무실이 불타있을 수도 있으며, 어떤 시급한 일이 생겨 정신없는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 몇 달, 몇 년의 미래를 상상하고 계획하곤 한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현실의 안정성이 미래를 기획할 수 있도록 받쳐주기 때문이다.
해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추구하지만 동시에 안정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고착화된 현실이 비극적인 미래상만을 보여준다면 변화로 판단이 흘러갈 것이고, 반대로 변화의 가능성이 미약하거나 미래상의 불확실성이 현실의 안정감을 훼손한다면 안정으로 판단이 흘러갈 것이다.
그래서 변화의 진폭이 클 수록 발생할 가능성은 낮고 변화의 진폭이 작을 수록 보다 빈번하게 변화한다. 그러니 혁명은 짧고 역사는 길다. 길고 긴 역사속에 반짝 등장하는 혁명과 반동들 사이의 공간을 점진적인 변화 혹은 점진적인 퇴행이 차지한다. 만일 고착화된 퇴행의 시간이 길면 길 수록 그만큼 큰 변혁의 에너지가 응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급작스런 변화는 그만큼의 희생을 요구한다.
많은 희생을 치루지 않고 사회가 발전해가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회가 점진적으로 모순을 해소해 갈 때는 에너지가 응축되지 않으므로 혁명적 상황은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더디온다. 이 때 점진적 변화의 시도가 실패한다면 사회의 모순이 누적될 수 밖에 없으므로 혁명적 상황을 잉태하는 데에까지 이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혁명적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최대의 적은 사회모순의 주체가 아니라 바로 점진적 개혁가들인 셈이다.
한편 사회모순이 극단적으로 벌어지지 않은 상황이더라도 사회의 모순을 바라보는 프레임만으로 혁명과 같은 하나의 절대명제만을 도출할 수 있다. 이 때에는 여하한 형태의 점진적인 변화는 변절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허울좋은 개혁의 이름으로 모순상황을 유지시켜 준다거나 혹은 모순을 극대화시키는 또 다른 주체로 보는 시각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런 경우에는 대화와 타협의 여지가 협소해지고, 결국 비민주적인 쪽으로 경도되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예언자적 이념이 원리주의를 내포하는 경우다.
이런 식의 생각이 점진적 개혁을 압도할 경우에는 사회 모순에 대한 개선의 시도는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사회 모순의 미래상까지 감안한 극단적인 비판을 하고 그에 따른 극단적인 대안을 도출하게 된다. 현실의 인간은 현재를 감안할 수 밖에 없으므로 어느 단계까지 극단적인 대안은 폐기되고 구체제가 보다 고착화된다. 겉보기에 이념과 대안의 방향은 같지만 그 대안이 만들어내는 현실에서의 역할은 정 반대로 흘러간다는 얘기다. 원하든 원치않든 모순을 극대화시키는 데에 일조하고 그렇게 해서 원하는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상은 복잡다단하여 한 시대의 한 사회 조차도 제대로 분석하기엔 인간의 지력이 모자란다. 결론내려 두었던 답안이 최불암식 오답이었다면 여간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확고하게 결론내린 어떤 주의주장이 있더라도 견해의 다름을 경주하고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원리주의 프레임은 이것을 거부하기 일쑤다.
사회를 완벽히 분석해 낼 시각과 대안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사회가 환경에 적응해 갈 수 있는 이유는 내부의 다양한 생각과 사람들을 자산으로 외부환경에 맞추어 진화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때 다양한 시각이 상호작용할 수록 적응의 폭이 넓어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상호작용할 수록 대응의 기초가 탄탄해진다. 어떤 생각이나 집단이 사회 안에서 제 역할을 못하면 도태되어버리거나 아니면 그 집단이나 생각 때문에 사회가 도태되어버린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현실적 의미가 있다.
역시 "불관용을 관용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