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흥 부사(永興府使) 김효원(金孝元)이 졸하였다. 효원은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로서 전례대로 자급을 올려 영흥 부사에 제수되었는데 1년이 지나서 고을에서 졸하였다.
효원은 벼슬살이에 있어서 청렴 결백하였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정결하고 민첩하게 하였으며 세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모두 우수하였다. 젊었을 때 날렵하여 일을 좋아하였고 논의가 과격하였으므로 동류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그의 밑에 있었는데 또한 이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원한을 사기도 하여 끝내 당파의 괴수라는 명목으로 죄를 얻어 외직에 보임되었다.
한직(閑職)에 있으면서 잘못을 반성하여 낮은 벼슬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고 시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며, 친구에게 보내는 서찰 내용에도 조정의 득실에 대해서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늘 탄식하면서 ‘당초 전조(銓曹)의 석상에서 발언한 한 마디 말은 단지 나라를 위해서였는데 어찌 이토록 분란이 생길 줄이야 생각했으랴. 나로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하였다.
그의 부친이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있었는데 늘 문안갈 적마다 개성을 거쳐가게 되었다. 그런데 심의겸(沈義謙)이 유수(留守)로 있으면서 매우 다정스럽게 그를 영접하여 주자 효원도 그곳에서 하루 이틀 묵어가며 친구인 것처럼 즐겁게 지냈다. 그 후 효원이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부임하여 관아에 좌기(坐起)했을 때 의겸의 부음(訃音)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친구를 잃었구나.’ 하고, 이틀간 좌기를 파하고 소식(素食)을 하였는데, 아마도 깊이 후회되는 바가 있어서일 것이다.
유성룡(柳成龍)은 일찍이 그의 위인에 대해 논하기를 ‘金孝元"인백(仁伯)은 강방 정직(剛方正直)하니 의당 동류 중에서 제일인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당론(黨論)이 일어나게 된 것은 전조의 천망(薦望)에서 시작되어 대신들이 추감(推勘)한 데서 터진 것으로 야박스런 습속이 떠들어대며 서로 선동질한 것이지 이 두 사람이 각자 당파를 만들어 불화를 일으킨 데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효원의 아우 김신원(金信元)·김의원(金義元)도 모두 명성이 있는 인물들이었고, 이들의 친구인 이성중(李誠中) 등의 논의 역시 완화(緩和)하여 처음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이발(李潑) 등은 이에 불만을 품고 자기들까지 떨어져 또 하나의 당파로 갈라졌다.
==>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다가 김효원에 대한 선조수정실록 상의 졸기를 보니 인물평이 유시민선생에
대한 보수측의 시각과 유사해서 옮겨봤습니다.
동인과 서인의 다툼이 현재의 진보와 보수의 다툼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재미있네요^^
붕당을 막지말고 지금처럼 허용했다면 어떨까요? 조선사회가 더 발전적인 사회가 되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실록은 원 실록과 수정실록의 두본이 있습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시절인 동인집권기에
만들어졌고 선조수정실록은 쿠데타 이후인 인조임금 당시인 서인과 남인집권기에 작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정치관점에 따라서 동일인물에 대한 평이 극과 극인 경우가 많습니다.
유성룡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일하기 싫어서 조선왕조실록 검색하다가 올려봤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경선 마지막 날인데 원하는 결과보시고 즐거운 4월 맞이하시기 바랍니다.